[오늘과 내일/신치영]‘금융의 삼성전자’ 못 나온다는 법 없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1월 24일 03시 00분


신치영 경제부장
신치영 경제부장
한국 금융의 역사는 예속의 역사였다. 1960, 70년대 국가주도 산업화시대에 은행들은 국가의 심부름꾼에 불과했다. 국가가 들여온 외자를 국가가 만든 계획대로 기업들에 빌려주고 정해준 이자를 받는 창구에 불과했다. 정부는 은행의 예산과 인사까지 틀어쥐고 있었다. 임직원을 어떤 기준으로 평가하고 승진시킬지, 예산은 어떻게 쓸지를 정부에 보고하고 승인받아야 했다(강경식 전 부총리 ‘국가가 해야 할 일, 하지 말아야 할 일’). 한국 축구 발전의 토대가 된 은행권 축구단 창설도 재무부 주도로 이뤄지던 때였다.

은행장들은 정권의 말만 잘 들으면 자리를 보존하며 막강한 권한을 휘두를 수 있었다. 돈은 부족하고 자금 수요는 넘치던 당시엔 은행 대출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특혜였기 때문이다. 은행들은 ‘관치금융’에 자연스럽게 길들여졌다. 정권의 대리인으로서의 은행 역할은 1997년 외환위기 이전까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은행들은 정부가 결정하는 대로 대출을 해주거나 자금을 회수하면 뒤탈이 없었다.

외환위기 때부터 22년간 재정경제원 등 정부 부처와 한국은행, 시중은행 등을 취재해온 필자가 보기에 정도는 달라졌을지 몰라도 지금까지도 한국 금융의 예속의 역사는 이어지고 있다. 자금과 인사는 여전히 정권의 영향력 아래 있다. 정치적 계산에 따라 어떤 회사(대우조선해양)는 분식회계 의혹에도 은행들을 앞세워 7조 원이 넘는 자금을 지원해주고, 어떤 회사(한진해운)는 법정관리로 내몬다. 금융지주 회장들은 만신창이가 되도록 투쟁을 벌여야 간신히 연임할 수 있다. 감사, 사외이사 등 잘 보이지 않는 자리엔 대선 캠프 출신 낙하산들이 줄지어 내려온다.

금융을 관치의 올가미에서 풀어주고 산업으로 키우자는 비전은 외환위기 여파에서 벗어난 노무현 정부 때 본격화됐다. 동북아 금융허브가 바로 그것이다. 이명박 정부 때는 대형화, 박근혜 정부 때는 금융 선진화 비전이 있었다. 비록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금융산업을 육성해야 한다는 인식은 있었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는 이런 인식조차 보이지 않는다. 금융을 보는 시각은 더욱 가혹해졌다. 금융회사들은 자영업자로부터 과도한 수수료를 뜯어가거나 손쉬운 이자 장사로 서민을 약탈하는 파렴치한 집단이라는 여론몰이를 한다.

관치의 족쇄에 묶인 사이 우리나라 금융산업은 갈수록 퇴보했다.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12년 5.50%에서 4.96%로 떨어졌고, 금융업 일자리는 작년 말 79만1000개로 4년 사이 8만4000개가 사라졌다. 전통 금융 강국인 영국의 경우 금융산업의 GDP 비중이 12%에 이르고 종사자가 130만 명에 이른다.

본보가 현재 연재 중인 ‘강한 금융이 강한 경제를 만든다’ 시리즈 취재를 위해 본보 기자들과 특파원들이 주요국들을 돌아다니며 취재한 결과 금융과 정보기술(IT)의 융합을 통해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는 신금융 혁명이 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제 우리도 금융을 산업으로 키워야 할 때가 됐다. 금융산업 육성은 경제를 키우고 일자리를 만들고 국부를 창출하는 길이다.

정부는 채용비리와 같은 금융산업 스스로 신뢰를 갉아먹는 행위, 돈 되는 특정 분야에만 대출이 몰리는 쏠림 현상 등을 막을 수 있도록 금융감독을 철저히 수행해야 하겠지만 금융회사를 서비스 기관 취급하며 지나치게 공공성을 강조해서는 안 된다.

전광우 전 금융위원장의 말을 그대로 전한다. “우리 몸이 아무리 커져도 심장과 혈맥이 강하지 않으면 건강할 수 없습니다. 이제 경제의 심혈기관인 금융산업에서 경제성장의 모멘텀을 찾아야 합니다.”
 
신치영 경제부장 higgledy@donga.com
#삼성전자#금융산업#경제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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