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HRS/WK’는 혁신의 아이콘 스티브 잡스를 상징하는 문구 중 하나다. 주당 90시간 근로를 뜻하는 이 말은 잡스의 야심작 매킨토시의 발표 예정일인 1984년 초를 몇 달 앞두고 등장했다. 당시 매킨토시팀은 주중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오후 11시까지 일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잡스는 매킨토시팀이 주 90시간씩 일한다는 사실을 외부에 자랑스럽게 말하고 다녔고, 애플의 재무부서는 ‘90 HRS/WK…AND LOVING IT!(주 90시간 일하니 좋아요)’라는 문구를 넣은 회색 후드티를 제작해 직원들에게 나눠줬다.
최근 실리콘밸리에서는 주당 90시간을 넘어 ‘주당 100시간’ 근로가 화제로 떠올랐다. 전기차 분야에서 가장 혁신적인 선도기업으로 통하는 테슬라에서 벌어진 일이다. 테슬라는 첫 대중형 전기차인 ‘모델 3’이 생산차질을 빚으면서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섰다. 창업주 일론 머스크를 비롯한 테슬라의 모든 직원은 9월부터 주당 100시간씩 일한 끝에 겨우 내부 생산 목표를 맞추고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주 52시간 근로제가 본격 시행되는 내년부터 한국에서는 매킨토시의 성공담이나 테슬라의 위기탈출 스토리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질 것 같다. 탄력근로 확대를 위한 연내 입법이 청와대의 노동계 눈치 보기 때문에 불투명해졌기 때문이다. 현행법의 테두리에서 탄력근로를 하기 위해서는 2주 안에서(노사 합의가 있을 때는 3개월) 주당 평균 52시간을 맞춰야 한다. 일감이 없을 때 덜 일하고 일감이 많을 때 더 일하는 작업방식이 2주∼3개월 단위로만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매킨토시나 테슬라와 유사한 성공신화의 연출은 사치라고 치자. 4차 산업혁명과 정보기술(IT) 관련 산업, 게임 등 소프트웨어 연관 산업은 생존조차 쉽게 장담할 수 없게 된다. 전 세계를 무대로 치열한 신제품 출시경쟁이 벌어지는 이 분야는 일이 특정 시기에 집중되는 것이 특징이고, 한 달이나 하루가 사활을 갈라놓기도 한다.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모텐 한센 교수(경영학)가 5000명을 대상으로 5년간 자료를 수집해서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가장 생산적인 근로가 가능한 최적의 시간은 주당 50∼55시간이라고 한다. 따라서 주 52시간 근로는 장시간 근로와 낮은 생산성으로 상징되는 한국의 기업문화를 바꿀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다만 생산성의 문제는 생사(生死)의 문제가 해결된 다음의 일이다.
4차 산업혁명과 IT 분야에서 한국의 강력한 경쟁자인 중국의 기술기업들 사이에서는 ‘996’이라는 말이 일상적으로 쓰인다.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주 6일 일한다는 뜻이다. 엔지니어들의 세계에서는 오전 10시쯤 출근해서 한밤중에 들어가는 것이 상식이라고 한다. 밤낮을 잊고 눈에 핏발을 세워가며 일하는 미국이나 중국기업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기회가 오거나 위기가 닥쳤을 때 더 평소보다 집중해서 일할 수 있는 탄력근로제를 확대하는 것이 최소한의 필요조건이다.
매킨토시의 본체를 설계한 엔지니어 버렐 스미스는 매킨토시의 성공으로 두둑한 보너스를 챙기자마자 애플을 사직했다. 사직 후 그는 후드티에서 ‘9’자를 지워버리고 ‘0 HRS/WK…AND LOVING IT!(0시간 일하니 좋아요)’라는 문구만 남긴 채 입고 다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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