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미국 중간선거(11월 5일)가 실시된 지 정확히 40일이 지난 12월 15일. 앨 고어 전 부통령은 결단을 내렸다. CBS의 간판 뉴스프로그램 ‘60분’에 출연해 ‘2004년 대통령선거에 출마할 건가요?’라는 진행자 레슬리 스털의 질문에 “출마하지 않겠다”라고 대답했다.
단호한 대답에 다소 놀란 듯, 스털은 ‘출마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요?’라고 다시 물었다. 고어는 차분한 어조로 “2004년에 대통령 후보로 나서지 않기로 결정했다”라고 못을 박았다. 고어의 정계 은퇴가 확정된 순간이었다.
진행자가 놀란 이유는 당시 고어가 정말로 출마할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중간선거 지원유세에 나서면서 대권 주자들의 단골 행선지인 아이오와와 뉴햄프셔주를 찾았고, 같은 해 11월에만 책을 두 권 출간하며 아내와 함께 북 투어에 나서기도 했다.
당시 54세였던 그는 인기도 많았다. 그해 11월 중순 시사주간지 타임과 CNN이 공동으로 진행한 여론조사에서 ‘고어가 재출마했으면 좋겠느냐’는 질문에 긍정적으로 답한 민주당원은 61%에 달했다. 후보 선호도 조사에서도 그는 53% 지지를 얻어 존 케리 등 민주당 내 다른 후보 여섯 명을 압도적으로 제치고 1위였다. 2년 전 대선에서 총득표에서는 공화당 조지 W 부시 후보를 이기고도 선거인단 수에서 져 백악관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경력은 그의 대권 재도전이 마치 필연인 듯 보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프런트 러너(선두주자)’ 대우를 받았음에도 그는 “올바른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끝내 대권 재도전을 포기했다. 결과적으로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 후 그는 환경운동가로 변신해 노벨평화상까지 받았다.
추억의 인물인 고어가 떠오르는 이유는 그의 닮은꼴인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의 대권 재도전설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6년 전과 마찬가지로 미국 고유의 대선제도 탓에 백악관 주인이 되지 못한 인물의 ‘복수혈전’ 시나리오가 펼쳐질 것인가에 대중의 호기심이 쏠리기 시작했다.
그 발단은 11일 월스트리트저널(WSJ)에 게재된 클린턴 가문의 전략가 출신 마크 펜의 ‘힐러리는 다시 뛸 것이다’라는 제목의 칼럼. 민감한 힐러리 재도전설을 정면으로 다룬 것이다. 최근 자서전을 출간한 미셸 오바마 여사도 책 홍보를 위해 ABC방송 인터뷰에 나섰다가 ‘힐러리가 재출마해야 한다고 보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정도로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힐러리가 고어보다 대선 재수에 유리하다고 볼 만한 이유가 몇 가지 있다. 고어가 재대결에 나섰다면 그 상대는 당시 지지율 60% 후반의 인기 높은 현직 대통령(조지 W 부시)이었다. 반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지지율 40% 언저리에 머물러 있는 상황이다. 이번 중간선거에서 ‘여풍(女風)’이 불면서 ‘미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에 대한 유권자들의 열망도 다시 올라갔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힐러리의 재출마설에 우군마저도 고개를 내젓고 있다. CNN 평론가 크리스 실리자는 13일 이를 ‘끔찍한 아이디어’라고 혹평하며 “힐러리에 대한 뿌리 깊은 부정적 인식이 이번이라고 바뀔 리가 없다”고 말했다. CNN은 15일 다른 보도에서는 “힐러리, 제발 그러지 말라”고 절규에 가까운 만류를 했다.
고어는 16년 전 ‘60분’ 인터뷰에서 다시 민주당 후보로 선출될 가능성이 충분한데도 대권 재도전의 ‘마지막 유혹’을 거절한 이유를 두고 “나와 부시 대통령의 재대결이 이뤄진다면 어쩔 수 없이 과거에 초점이 맞춰질 것이다”라며 “선거는 미래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당내에서도 (재도전 이슈 때문에) 지친다는 얘기가 나온다는 걸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복수혈전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듯한 힐러리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사람이 고어다. 재출마설 논란에 마침표를 찍을 만한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않는 힐러리에게 고어가 조언을 건넬 수 있다면 자신의 ‘60분’ 인터뷰 내용을 찬찬히 읽어보라고 하지 않을까.
2020년 미국 대선이 2016년 같은 진흙탕으로 변질되는 것은 미국 유권자도, 국제사회도 바라는 바가 아니다. 중간선거가 끝난 지 20일이 지났다. ‘마지막 유혹’을 마주한 힐러리의 마지막 결단이 임박해 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