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이맘때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풍경이 있습니다. 매서운 찬 바람과 뎅그렁 울리는 손종 소리와 빨간 자선냄비죠.
30일 오전 11시 서울 광화문 북측 광장에서 본격적인 자선냄비 거리 모금을 알리는 시종식(始鐘式)이 열립니다. 전국 440곳에서 자원봉사자 5만7000명이 거리 모금에 나설 예정이라네요. 구세군에 따르면 최초의 구세군 자선냄비는 1928년 12월 옛 동아일보 사옥(현 일민미술관) 앞에 설치됐습니다. 동아일보는 그해 12월 22일자 ‘구세군주최 자선과설치(救世軍主催 慈善鍋設置)’ 기사에서 모금에 나선 여성 사진과 함께 구세군이 빈민을 구제하고자 자선냄비를 설치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솥 또는 냄비를 가리키는 한자 ‘과(鍋)’를 쓴 것이 흥미롭습니다.
올해 개신교계는 교회 세습과 목회자의 성추문 등으로 논란이 적지 않았지만 초심(初心)을 잊지 않은 종교인들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최근 찾은 서울 서대문구 독립문로 구세군 서울후생원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일하는 구세군 사관과 자원봉사자의 노력을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다음 달 30일 설립 100주년을 맞는 이곳은 가정 내에서 양육이 어려운 아이들을 돌보는 아동생활시설입니다. 이곳 출신으로 고교를 마친 뒤 캐나다로 요리 유학을 떠난 최다현 씨(21)의 편지를 보게 됐습니다. 최 씨는 고교 3학년이던 2015년 영국에서 열린 구세군 150주년 국제대회에 후생원 풍물팀으로 참가하면서 외국에 나가 요리 공부를 하고 싶다는 소망을 품게 됐다고 합니다. ‘Dear My family, 구세군 서울후생원’으로 시작하는 그의 편지에서는 가족들을 보고 싶다는 그리움과 “학비가 비싼 만큼 수석 졸업하고 싶다”는 당찬 각오도 읽을 수 있었습니다.
1997년 교회 설립 이후 최근 21번째 교회 분립(分立)으로 화제를 모은 경기 고양시 거룩한빛광성교회 정성진 목사(63)는 신앙의 목소리에 충실하기 위해 노력해온 목회자입니다. 2012년 인터뷰를 위해 교회의 집무실에 들어선 순간, 액자의 글자가 눈을 확 끌었습니다. ‘아사교회생(我死敎會生·내가 죽어야 교회가 산다).’ 이순신 장군의 ‘필사즉생(必死則生·죽으려 하면 살 것이요)’을 연상시키는 비장한 각오였죠. 이 문구는 정 목사가 교회 설립 예배를 올리던 날 신학교 은사인 청량리 중앙교회 임택진 원로목사가 팩스로 보내온 것입니다. 아사교회생의 후렴구는 목사가 살면 교회가 죽는다는 아생교회사(我生敎會死)죠.
최근 소속 교단법 정년(70세)보다 훨씬 이른 63세의 조기 은퇴를 선언한 그를 6년 만에 만났습니다. 그의 집무실 한쪽 메모판에 ‘행백리자반어구십(行百里者半於九十)’이란 문구가 보였습니다. 길을 가는 데 처음 90리와 나머지 10리가 맞먹는다는 것으로 처음은 쉬워도 끝맺기가 어렵다는 의미죠. 그에게 이 문구는 자만한 게 아닌지, 퍼뜩 정신이 들게 하는 경종(警鐘)이었다고 하더군요.
초심의 종소리는 최근 설립 30주년을 맞은 새에덴교회(경기 용인시 죽전로) 소강석 목사(56)에게서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 교회는 설립 당시 기도했던 섬김과 나눔을 위해 소외된 이웃을 위한 30가지 축제로 특별한 11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교회 규모가 커지면 가까운 이웃은 물론이고 국가와 민족을 위한 역할도 마땅히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입니다. 12년째 진행 중인 해외의 6·25전쟁 참전 용사 초청 행사가 대표적인 사례죠. 부담이 적지 않은 교회 신자들에게 한 말씀 해달라고 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천국 가면 제가 여러분의 종이 되겠다. 부르면 언제든 달려가 신자들에게 따뜻한 짬뽕을 대접하겠다.”
페이스북 친구로 이따금 소식을 접하는 이호영 목사(58)는 왕년의 전설적인 헤어디자이너입니다. 1998년까지 서울 강남에서 ‘이홍 머리방’을 운영한 그는 한때 손님이 많아 갈퀴로 긁듯 돈을 벌었다고 합니다. 연예인과 모델까지 등장하는, 당시로서는 생소한 헤어쇼를 주최하며 박준 헤어디자이너와 어깨를 나란히 했습니다. 형의 갑작스러운 죽음 등 몇 가지 사연이 그를 신앙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2004년 목사 안수를 받은 그는 현재 경기 안성시에 터전을 잡고 참살이힐링마을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1990년대 후반부터 시작한 미용봉사를 위해 아직도 가위를 놓지 않은 ‘사랑의 가위손’이기도 합니다. 2005년부터 매년 8월 말이면 어김없이 봉사를 위해 홍도행 여객선에 몸을 싣습니다. 뱃삯과 숙식에 드는 비용도 자신들이 부담한다고 하네요.
거리의 자선냄비와 손종 소리는 한 해를 마감하는 시기의 징표가 됐습니다. 당신의 마음 시계는 어디쯤 가고 있나요? 혜민 스님의 말처럼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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