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과 유럽연합(EU)이 25일 브렉시트 합의문을 공식 추인했다. 그런데 영국은 EU는 탈퇴하지만 EU 관세동맹에는 남기로 했다. 이는 영국령과 독립국으로 나뉘어 있지만 하루 3만 명이 자유롭게 오가는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 간 국경에 관세를 매기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 뉴스를 보며 2006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이 생각났다. 1920년 영국 지배하에 있던 아일랜드의 한 마을에서 형제가 영국군의 극악한 횡포에 분노해 무장투쟁에 뛰어든다. 아일랜드인들의 피나는 투쟁 결과 평화조약이 맺어진다. 그러나 완전한 독립이 아니라 영국 신교도가 많이 이주한 북아일랜드는 영국령으로 남겨두고, 아일랜드는 자치령인 ‘아일랜드 자유국’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형제는 대립한다. 완전한 독립을 위해 계속 싸워야 한다는 편에 선 동생과, 더 이상의 희생을 막기 위해 일단 평화조약을 인정하자는 편에 선 형의 갈등은 결국 형이 동생을 처형하는 비극으로 이어진다.
영화는 ‘절대적 정의’에서 ‘상대적 정의’로의 전환을 보여준다. 영국군의 폭압에 맞서 싸우는 단계에서 형제의 투쟁은 절대적 정의, 절대선이었다. 일제하 독립투쟁, 군부독재 시절 한국의 민주화 투쟁이 그랬듯 절대적 도덕성과 당위성을 지닌 것이었다.
그러나 평화조약을 놓고 대립하는 내전 단계에서 형과 동생이 각각 주장하는 정의는 상대적 정의일 뿐이다. 상대방은 척결해야 할 절대적 악이 아니라 서로 의견과 지향점이 다를 뿐이다.
우리 현대사도 그런 단계를 거쳤다. 1987년 6월항쟁까지 민주화 투쟁은 절대선, 절대적 정의였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엔 상대적 정의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민주화에 대한 염원으로 뭉쳤던 여러 세력은 분화되고, 진보냐 보수냐에 따라 선악이 달라지는 시대가 됐다. 제3자의 눈으로 보면 더 바람직하고 덜 바람직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한쪽이 천사고 한쪽은 악마인 그런 구분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불행히도 우리 사회에는 자신의 지향점이 절대선이고 상대는 절대악이라고 여기는 ‘구시대에서 멈춘 사고방식’이 여전히 팽배하다.
보수궤멸론을 주창했던 여당의 이해찬 대표는 최근 “정조대왕이 돌아가신 1800년부터 지금까지 김대중 노무현 정부 외에는 한 번도 민주·개혁적인 정치세력이 나라를 이끌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이 대표뿐만 아니라 집권그룹 안팎과 시민단체, 노조 등에는 자신들만이 민주세력이라고 여기는 사고방식이 만연해 있다.
자신들만이 개혁을 했다는 주장도 착각이다. 금융실명제, 하나회 척결, 공직자 재산 공개, 노동법 개정, 경제 구조조정, 국정 분권, 연금 개혁, 공공기관 개혁…. 민주화 이후 주요 개혁정책 리스트다. 이 중에는 보수정권 때 이뤄진 것도 많다.
이 대표는 서민, 노동자 등을 위한 복지·분배에 역점을 둔 것은 자신들뿐이라고 강조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규제, 연금, 노동시장, 공공부문 등 우리 사회에 시급한 개혁 대상 가운데는 노조와 서민계층이 반기지 않는 것도 있을 수 있다. 정조대왕은 인재를 널리 등용하면서 서얼 철폐 같은 개혁과 더불어 파격적인 경제 개혁을 폈다. 상업을 천시했던 양반 사회의 벽을 뚫고 상업을 가로막는 법·제도를 고쳤으며 ‘금난전권 폐지’를 통해 독점권리를 갖고 있던 시전상인들의 기득권을 깨고 자유로운 경쟁을 촉진시켰다.
문재인 정부의 분배 지향 정책들이 부작용을 빚고 있지만 절대악은 아니다. 토론하고 보완하고 속도 조절하면 된다. 그러나 자신들만이 민주·개혁 세력이라는 오만 속에 절대선으로 착각하며, 비판을 기득권 세력의 저항쯤으로 여기는 구시대적 발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결과는 참담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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