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일본 기업의 배상을 명령한 10월 30일 한국 대법원 판결 이후, 한일 관계는 가히 빙하기를 맞고 있다. 특히 고노 다로 일본 외상의 반응이 갈수록 공격적이고 자극적이다. “폭거이자 국제질서에 대한 도전” “양국 관계 유지도 어렵다” 등의 감정적 언사를 쏟아낸다.
과거 한일 관계에서 반감이 폭발한 쪽은 주로 한국이었다. 교과서 문제, 독도 영유권 주장, 전쟁 강제동원 부정 등의 일본 측 발언이 나올 때마다 한국에서는 망언(妄言), 적반하장(賊反荷杖) 등의 대(對)일본 비난이 터져 나왔다. 일본 정부 당국자가 앞장서서 ‘폭거’ 같은 비외교적 언어를 구사한 일은 거의 없었다. 그 점에서 고노 외상의 이번 언행은 극히 이례적이다. 한일 관계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야 할 당국자의 태도로는 선을 넘은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그는 일본 정치인 중 지한파다. 과거 한국인 출신 비서를 채용해 한국을 공부하기도 했다. 미래지향적 한일 관계를 강조한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 20주년(10월 8일)을 계기로 한국과의 문화 교류를 확대하기 위한 전문가 모임을 주관하며 바쁜 가운데서도 모든 회의에 처음부터 끝까지 참석했다. 회의가 그의 외유 일정에 맞춰 열렸을 정도다.
그렇게 정성을 기울였건만, 상황이 자신의 기대와는 전혀 다르게 흘러가는 데 따른 ‘실망감’이 분노로 이어진 것 아니냐는 해석도 있다. 기본적으로 일본은 민간 청구권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보상 책임은 1965년 한일협정을 통해 청구권 자금을 수령한 한국 정부에 있다는 인식이다. 그런데도 한국 정부가 대법원 판결에 대해 수수방관하고 있다는 것이 그들의 불만이다.
“일본인들은 100을 전달하려면 50만 말한다. 나머지는 상대가 알아들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100을 전달하려면 200을 말한다. 결국 일본이 한국에 100을 제대로 전달하려면 150, 200을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에는 한국과의 의사소통과 관련해 이런 말이 내려온다. 고노 외상의 요즘 발언은 이를 염두에 둔 것으로도 보인다. 문제는 그 고강도 발언이 거꾸로 한국인의 반일 감정을 부추기고 한국 정부가 대처할 여지를 빼앗는다는 점이다. 아니면 ‘갈 데까지 가보자’는 생각인 걸까.
대법원 판결 이후 고노 외상뿐 아니라 일본에서 한국을 이해하고 두둔하던 오피니언 리더들이 가장 화를 내고 있다는 점은 우려스럽다. 그들은 “판결문은 지난 세기 한일 간의 역사를 뒤집는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이라며 답답해하고, 한국이 ‘미래지향’을 강조하지만 실제 행동은 과거로 가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이제는 “정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한번 지켜보자”고 말한다.
답답하던 차에 시야가 넓어지는 의견을 만났다. 독일 통일 당시 유럽 특파원으로 현장을 지켰던 일본의 원로 언론인은 사석에서 “남과 북이 하나가 되려는 한반도의 큰 흐름 속에서 공동의 적(敵)은 일본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 남북이 가까워질수록 민족주의가 강화되면서 반일이 부각되는 흐름을 보일 것이라는 해석이다. 그에 따르면 독일 통일 과정에서도 민족주의는 고양됐다. 특히 서독인들이 ‘경제적 격차’가 있는 동독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 민족주의라는 촉매가 불가결했다. 한국도 ‘우리는 하나’라는 구호를 되살리려면 한반도 분단 이전의 역사, 분단의 원인을 제공한 일본제국주의를 계속해서 곱씹을 필요가 있을 것이란 얘기다.
그의 결론은 “독일의 경우처럼 이는 이해할 수 있는 일이고 일본은 이웃나라의 통일을 도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국 정부가 이 정도로 전략적 사고를 하고 있는 걸까. 그렇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그런데 아니면 어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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