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기강 드러낸 ‘행정관의 亂’… 박근혜 정부 때와 대응 비슷해
민정·비서실장 제 역할 했다면 국정농단 사태로 번졌을까
괴물과 싸운다며 괴물로 변하는 청와대 권력은 누가 견제하는가
5년 단임 대통령제의 좋은 점이 있다면 5년 단위로 과거를 비교할 수 있다는 거다. 한 번 본 소설도 다시 읽으면 복선이 보이듯이 머리카락 보일라 숨어 있던 권력비리도 한 자락은 볼 수 있다. 정권마다 이런 과거가 거듭됐으면 교훈을 얻을 만도 한데, 인간은 변하지 않고 역사는 반복된다는 게 슬플 정도다.
도덕성을 코에 건 문재인 정부도 ‘행정관의 난(亂)’을 피해 가진 못했다. 지난주 전원 교체했다는 청와대 특별감찰반 행정관들의 비리 중에는 장관 이름까지 고구마 줄기처럼 엮여 나온다. 그런데도 조국 민정수석은 사과 한마디 없이 “소속청 감찰을 통해 사실관계가 최종 확인되기 전에는 일방의 주장이 보도되지 않기를 희망한다”며 취재 보도까지 제한하려 들었다.
5년 전도 비슷했다. 골프 접대를 받은 청와대 행정관이 징계도 없이 원대 복귀했다는 2013년 11월 동아일보 단독보도에 이정현 홍보수석은 “청와대라는 특수성 때문에 부처로 원대 복귀하는 것 자체가 상당한 징계”라며 청와대 권력의 오만을 감추지 않았다. 다섯 달 뒤 이들이 정기인사에서 보직까지 받았다는 보도가 터지자 박근혜 대통령은 “기본이 바로 선 나라를 만들기 위해 비정상화의 정상화를 추진하고 있다”고 비서실에 유감을 표명하며 개혁 의지도 밝혔다.
지금 생각하면 섬뜩하다. 그때 청와대는 ‘정윤회 문건’ 같은 문서들을 누군가 빼돌렸음을 깨닫고 유출자 색출로 발칵 뒤집힌 상태였다. 2014년 말 “권력 서열 1위는 최순실, 2위는 정윤회, 3위가 대통령”이라는 전 행정관의 폭로 역시 우습게 듣지 말아야 했다. 만일 ‘기춘 부원군’이 윗분의 뜻만 받드는 대신 직언하는 비서실장이었다면, 대통령이 ‘문고리 3인방’과 최순실을 끊어내는 개혁을 해냈더라면 청와대 주인은 달라졌을지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청와대 권력 서열 1위는 문재인, 2위는 윤건영 국정기획상황실장, 3위는 김경수 경남지사”라는 대선 댓글 조작사건 드루킹의 발언도 새겨둘 필요가 있는 건 아닌가.
2008년 이명박 정부 때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청와대 A, B, C와 D 의원이 대통령 말도 잘라먹고 강부자(강남, 부동산, 부자) 인사를 했다는 정두언 당시 한나라당 의원의 폭로는 큰 틀에서 틀리지 않았다. ‘만사형통(萬事兄通)’ 이상득의 측근인 ‘왕비서’ 박영준 대통령기획조정비서관을 다신 호가호위(狐假虎威)하지 못하게 했다면 민간인 불법 사찰이나 형님의 구속 같은 불상사는 없을 수도 있었다.
노무현 정부도 다르지 않다. 2003년 2월 벌써부터 인사청탁설이 나돌던 대통령의 형 건평 씨를 면담하고는 “해프닝성”이라고 일축했던 ‘왕수석’이 문재인 민정수석이었다. 노 정부의 마지막 비서실장을 지낸 문 대통령은 2009년 한 언론에서 “노건평 씨와 박연차 회장의 관계를 볼 때 사고 날 가능성이 있어 출범 초부터 유심히 워치했다”면서도 “그렇다고 해서 손바닥에 올려놓고 보듯이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고 했다. 노 대통령이 서거하기 한 달 전 인터뷰에서다.
민정수석이, 비서실장이 대통령과 정부의 명운을 좌우할 순 없다. 그러나 이번 같은 청와대 기강 해이 사태는 청와대 대응에 따라 ‘정의로운 나라’로 바뀌었음을 체감할 수도 있는 법이다. 거꾸로 정권의 몰락을 앞당길 수도 있다. 대통령한테 대리운전을 시킨다는 말까지 듣는 ‘전대협 청와대’가 걱정스러운 것도 이 때문이다.
그래도 노무현 시절엔 야당은 물론 여당도 가끔 할 말을 했다. 당시 김우식 비서실장은 택시기사에게 들은 쌍욕까지 대통령에게 전했다. 박근혜 시절에도 집권당 의원이 대놓고 김기춘 실장 경질을 요구했다. 그러나 어제 더불어민주당은 사과 논평을 내면서도 비서실 문책 요구는커녕 “지난 10여 년간 대한민국을 지배한 것은 불공정과 불의의 역사였고 심지어 최순실이라는 괴물마저 탄생했다”며 전임 정부 핑계를 대는 방자한 태도였다. 검찰마저 경찰과 충성 경쟁을 하고 특별감찰관은 공석이며 감사원 역시 15년 만에 벌인 청와대 감사에서 내부 매점과 카페 수의계약 같은 가벼운 비리만 잡아내는 마당에 비서실 권력을 견제할 곳은 없다.
지난달 국감에 나온 임종석 비서실장을 향해 야당 의원은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최순실 들먹일 것 없다. 청와대나 괴물이 되지 않기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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