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을 주관하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이 카메라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그는 발표에 앞서 사과부터 했다. “너무 어려웠던 수능 난도 때문에 수험생과 학부모에게 혼란과 심려를 끼쳐 매우 송구하다”는 내용이었다. 격려도 잊지 않았다. “실망스러운 결과를 받게 되더라도 절대 낙담하거나 좌절하지 말라. 새로운 출발을 위한 소중한 기회로 삼자”고 당부했다. 이미 다 끝난 마당에 시험을 망친 학생들에게 얼마나 위로가 됐을지는 모르겠다.
앞뒤가 참 어색한 이 씁쓸한 사과와 위로의 현장을 보며 교육당국이 진짜 사과해야 할 일은 따로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창 시절의 끝엔 이렇게 냉엄한 입시의 현실이 존재하는데, 어린 학생들에게 딱히 공부를 하지 않아도 꿈과 끼만 좇으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처럼 미혹했던 것 말이다. 꼭 대입이 아니더라도 인간 사회의 속성상 취업 등의 관문마다 평가와 경쟁이 없을 순 없다. 하지만 교육당국은 ‘사교육 경감’이라는 제1목표 달성을 위해 ‘행복교육’을 외치며 학교의 교육 의무를 흐렸던 게 사실이다.
요즘 학생들의 학교생활은 기성세대 때와는 크게 다르다. 가장 큰 차이점은 초1부터 중1까지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같은 ‘일제고사’(전 학년이 같이 보는 시험)가 전혀 없다는 점이다. 다만, 초등학교에서는 아이들의 이해도를 파악하는 차원에서 담임의 판단에 따라 반별로 ‘단원평가’라는 것을 본다. 아이들이 따로 공부하며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는 걸 막기 위해 예고 없이 보는 경우가 많다.
일부 진보 성향 교육감은 시험은 물론이고 ‘숙제 없는 학교’도 역점 사업으로 운영한다. 해외에서는 학교 수업시간을 45분에서 65분으로 늘리는 등 ‘학교 내 학습’을 강조하며 ‘숙제 없는 학교’를 추진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냥 ‘초등 저학년까지 스트레스 주진 말자’는 취지다. 교육청 차원에서 사실상 지침이 내려오는 상황에서 숙제를 내 봤자 교사들은 힘만 들뿐 딱히 좋은 소리도 못 듣는다.
그래도 여기까진 괜찮다. 문제는 중2부터다. 중1 때는 ‘자유학기제’ ‘자유학년제’란 이름으로 시험 없는 삶을 살다가 중2 때 인생 첫 ‘○○고사’라는 것을 보고 아이들은 충격에 빠진다. 뒤늦게 공부를 하려 해도 기초 개념을 잡았어야 할 7년이 지난 상태라 좀처럼 쉽지 않다. 형편상 기댈 곳이 학교뿐인 아이들은 더 힘들다. 그 간격을 좁히지 못한 아이들은 결국 ‘기초학력 미달’이라는 이름의 집단으로 남는다.
‘학교가 덜 가르치도록’ 장려하는 교육시스템 속에서 학부모들은 ‘학교가 안 시키면 내가 시킨다’란 마음으로 사교육을 시킨다. 아이와 싸워 가면서까지 엄마가 교사처럼 딱 붙어 가르치기도 한다. 우리가 아는 많은 ‘내로남불 자녀교육’ 인사들도 입으로는 행복교육을 외치면서 정작 본인 자식은 외고, 자사고, 영재고, 명문대의 길을 걷게 했다. 행복교육이 그렇게 좋은 거면 왜 먼저 시키지 않았나.
기자의 특성상 교육특구의 교육방식부터 소외계층의 현장까지 다양한 교육형태를 관찰하게 된다. 흔히 한국의 교육격차를 두고 ‘기울어진 운동장’이란 표현을 쓰지만 막상 보면 기울어진 정도가 아니라 ‘끊어진 운동장’이다. 가진 자들은 학교가 덜 가르쳐도 상관없다. 어차피 학교만 믿고 가지 않기 때문이다. 먹고살기 바빠 입시제도가 어떤지 몰랐던, 학교만 믿었던 서민들만 뒤통수를 맞는다. 그런 면에서 교육당국이 진짜 사과해야 할 건 현실에 눈감고 이상만으로 공교육을 놓아 버린 것이다. ‘수능 국어 31번’ 사과보다 그게 먼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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