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린 죄’라는 말이 있다. 똑같은 위법을 해도 법망에 걸리면 처벌되고, 걸리지만 않으면 뻣뻣하게 고개 쳐들고 사는 현실을 비꼬는 의미다. 그 전제는 법망에 탈출구가 없다는 것이다.
검찰의 소위 국정 농단, 적폐 청산 수사로 처벌을 받았거나 그 대상에 오른 박근혜 정부 인사 다수는 ‘걸린 죄’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전 정부의 똑같은 자리에서, 똑같은 일을 했던 사람들은 아무 처벌도 받지 않고 넘어갔는데 나만, 우리만 억울하게 걸렸다는 것이다. 재판을 받고 있는 박 전 대통령의 한 측근은 사석에서 “솔직히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 “그래서 구치소에서 몸도 마음도 편안했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그는 법정에서도, 취재진 앞에서도 이런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차마 위법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투신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재수 전 기무사령관의 심정은 어땠을까. 세월호 유족 사찰 혐의를 받은 그는 유서에서 “세월호 사고 당시 기무사와 기무부대원들은 정말 헌신적으로 최선을 다했다. 5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그때의 일을 사찰로 단죄하다니 정말 안타깝다”고 했다. 정부의 유족 지원을 돕고 실종자 구조를 위해 유족 정보를 수집한 게 민간인 불법 사찰로 몰렸다는 것이다. 반면 검찰은 당시 기무사가 청와대에 정국 전환을 위한 실종자 수색 포기 등의 건의를 하면서 유족에게 불리한 여론 조성을 위해 사찰을 벌인 것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이 전 사령관은 ‘걸린 죄’라는 생각에 떳떳했을지 모른다. 5년 전 그 자리로 되돌아간다 해도 똑같이 할 거라고 되뇌었을 것이다. 다른 군인이 자기 자리에 있었더라도 다르지 않았을 거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편치 않았다. 자신의 구속영장은 기각됐지만 부하 3명이 구속됐기 때문이다. ‘윗선을 대라’는 검찰의 추궁은 정신적 고문이었다. 그는 유서에 “내가 모든 것을 안고 가는 걸로 하고 모두에게 관대한 처분을 바랍니다”라고 썼다.
1년 1개월 전 국가정보원 적폐 청산 수사를 받다 투신해 숨진 변창훈 검사도 비슷한 처지였다. 혐의는 국정원 파견 근무 중 검찰의 국정원 댓글 수사를 방해했다는 것. 함께 국정원에 파견됐던 선배 검사 1명과 후배 검사 1명이 같은 혐의로 구속된 상황에서 목숨을 끊었다. 당시 많은 검사는 “나라고 변 검사와 달랐겠느냐”고 말했다. 변 검사 자리에 있었다면 변 검사처럼 수사를 막으라는 상부의 지시를 거부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할 수밖에 없었던 일. 다시 되돌아가도 똑같이 할 수밖에 없다고 되뇐 일. 상사, 부하, 선후배, 동료의 처벌 여부와 수위가 나의 진술에 달려 있는 바로 그 일. 그게 올가미가 돼 수사를 받고, 재판을 받아야 하고, 구속될 위기에서 죽음으로 탈출한 것이다.
그렇다고 검찰이 미리 면죄부를 줄 수는 없다. ‘걸린 죄’도 죄다. 그 자리라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위법도 위법이다. 검찰이 그냥 넘기면 직무유기다. 재발 방지를 위한 서릿발 같은 수사도 필요하다. 그렇지만 수사의 궁극적인 목적은 삶이어야 한다. 기관도, 조직도, 회사도, 사람도 죽어서는 안 된다.
‘법이 걸어온 길은 논리가 아니라 경험이다.’ 법을 전문적으로 유리하게 이용하라는 의미다. 검찰은 이를 탈출구 없는 법망에 정상(情狀) 감안의 여지를 두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좋겠다. 그게 결국 검찰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검찰이 박병대, 고영한 전 대법관 구속영장을 재청구할 태세다. 수사의 성공은 구속이 아니라 유죄 입증이다. 검찰의 ‘논리가 아닌 경험상’ 수사는 아쉬울 때 자제하는 게 대개 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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