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세밑의 스산한 한국 사회… 적폐수사 와중 前기무사령관 자살
공기업 비정규직 청춘의 죽음
北독재 감싸고 인권유린 등 돌리고… 인간존중 그때그때 잣대 다르나
돌아볼 줄 알아야 돌아올 수 있다
세밑의 들뜬 기운을 찾아보기 힘들다. 가뜩이나 경제도 좋지 않은데 세상 돌아가는 분위기마저 심상찮은 탓인가.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지만 거리는 썰렁하고 행인들은 무표정하다. 더 가난했던 옛날보다 덜 민주적이었던 옛날보다. 서울 도심의 찬 바람에 펄럭이는 가로등 배너의 문구가 발길을 붙든다. ‘누구나 존엄하게.’
세계인권선언 70주년을 맞아 국가인권위가 내건 슬로건이다. 10일 세계인권의 날 기념식에 노무현 전 대통령 이후 처음으로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은 “누구도 차별받지 않는 포용적 사회를 만들겠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사회적 약자를 포함해 모든 사람이 동등한 권리를 누리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다름을 차별이 아니라 존중으로 받아들이고 함께 어우러져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런 교과서 같은 다짐이 영혼 없는 울림으로 들리게 하는 요즘의 국정이다. 유성기업 임원 폭행, 전 기무사령관의 자살을 보면 인권과 인간존중 원칙을 적용하는 데도 진영과 서열이 있는 것 같다. ‘네이처’지에 ‘정치적 숙청’으로 언급된 KAIST 총장 사태는 한국 사회의 후진성을 세계만방에 드러냈다. 사실 규명에 앞서 인격과 사회적 명예를 짓밟는 일이 노골적으로 빚어지는 현실은 ‘누구나 존엄하게’란 입발림과 명백히 모순된다. 북한 독재를 감싸고 그 인권 유린에 등 돌리는 행태는 말할 나위도 없고. 남들 눈엔 이 땅의 유구한 전통처럼 보일까 겁난다.
동서고금 막론하고 권력을 거머쥔 순간 보복 혹은 보은의 관행이 어김없이 작동한다 하더라도 그 도가 지나치면 문제다. 낙하산 인사로 점철된 보상 절차야 왕조시대 논공행상의 유산이라 치자. 더 큰 문제는 앙갚음. 직전 정권에서 일했거나 임명됐다고 ‘주홍글씨’를 새겨 모멸감을 안겨주고야 만다면 협량한 응징으로 보일 뿐이다. 줄곧 이런 식이면 대체 적폐청산의 추는 어디로 기울고 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공공의 악 근절인가, 패거리 간의 단순한 ‘복수혈전’ 시리즈인가.
특정 세력에 대한 편애 혹은 반감, 그를 호도하기 위해 편법으로 동원하는 포퓰리즘에 기댄 정책의 실패. 그 회오리가 초래할 파장이 걱정이다. 2년 전 구의역 사고가 기억에 생생한데 또 공기업에서 비정규직 청춘이 안타깝게 스러졌다. 대통령의 재검토 지시에 뒤늦게 발표된 국민연금 개편안은 어떤가. 다음 정부, 미래세대로 책임을 떠넘긴 폭탄 돌리기로 지적받는 것을 보면 집권 주체 스스로 ‘20년 집권’이란 구호를 건성으로 내건 듯하다.
김황식 전 국무총리는 사석에서 이런 말을 했다. 좌파 사민당의 당수로 노동사회 개혁을 밀어붙인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를 만나 정치인의 가장 큰 덕목을 물었더니 이런 답을 하더란다. “국가의 장래를 위해 정책을 마련해야 하는데 그 효과가 나타나는 데 시간이 꽤 걸린다. 그 사이 선거가 있으면 백전백패 가능성이 높다. 국익을 생각해 그 패배를 감내하는 것이 리더의 소중한 덕목이다.” 예상대로 슈뢰더는 선거에서 졌으나 그의 정책은 앙겔라 메르켈 총리에게 계승됐고, 그게 독일 정치의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김 전 총리는 덧붙였다. 어디 아름다움뿐이겠는가. 강한 국력이 바로 거기서 나오는 것 아니겠는가.
스산한 연말. 어지러운 마음을 다독여주는 다큐멘터리를 만났다. 일본인 노부부의 잔잔한 일상을 담은 영화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후대에 남길 돈은 없으나 자신들의 땀으로 만든 비옥한 흙을 남겨주고 싶다고. 지금 살아있는 시한부 권력은 사후에 무엇을 남길 것인가. 혹시 독 묻은 씨앗을 뿌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좁은 반도의 반 토막에서 동지와 적폐로 분리된 장벽을 세우고 상대를 조롱하고 궁지로 몰아넣는 것을 일삼으며 한없이 우쭐해하고 있지는 않은가.
돌고 도는 세상,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돌고 돌아오는 법. 최근 재판에서 ‘문고리 3인방’ 중 한 명은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다른 행동을 했더라면…”이라고 뒤늦은 후회를 했다. 민간사찰 의혹으로 번진 청와대 특별감찰반 사태가 과거 정권의 판박이 같다는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왜 이런 데자뷔를 우리는 자꾸 경험해야 하는가.
적당한 시점에 돌아볼 줄 안다면 절벽 앞에서 다시 돌아오는 것도 가능할 터다. ‘역사는 그대로 반복되지는 않지만, 그 흐름은 반복된다’는 말을 기억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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