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 요리사 후지모토 겐지는 ‘북한의 후계자 왜 김정은인가’라는 책에서 김정은이 지금 자리에 오른 것은 타고난 승부욕 때문이라며 이런 일화를 전했다. 10대의 김정은은 농구경기가 끝나면 반드시 자기 팀에서 총화(반성회)를 했다. 잘한 선수에겐 “패스 아주 좋았어”라고 손뼉을 쳐주고, 실수한 선수에겐 잘못을 무섭게 꾸짖었다. 반면 형 김정철은 “수고했다. 해산!”이라며 바로 사라졌다고 한다.
북한 사회를 집단우울증에 빠뜨린다는 연말 사업총화가 한창인 지금, 김정은도 한 해를 결산하며 신년사를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 휘하 간부들은 ‘지도자 동지의 주동적 조치가 세계사에 특기할 사변적인 한 해를 만들었다’고 입을 모을 테지만, 김정은의 속내는 편치 않을 것이다. 연초부터 기세 좋게 달려왔지만 손에 쥔 것은 없고 전망도 밝지 않은 게 요즘 형국이다. 그래서 여기저기 닦달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탓인지 북한의 대외관계도 사실상 문을 닫아 건 분위기다. 미국과는 진작부터 연락을 끊었다. 스티븐 비건 미국 대북정책특별대표는 임명 4개월이 되도록 카운터파트인 최선희 외무성 부상의 얼굴도 보지 못했다. 몇 차례 기회가 있었지만 번번이 바람맞았다. 만남을 피하기 위해 최선희가 예정에 없던 출장까지 만들었다는 얘기도 들린다. 그러니 비건도 이젠 북한에 대한 답답함을 넘어 짜증까지 표출한다고 한다. 그럼에도 어제 서울에 도착한 비건은 여전히 최선희와의 판문점 회동 가능성에 일말의 기대를 걸고 있지 않을까 싶다.
북한이 비건을 따돌리는 것은 무엇보다 김정은이 주장해 온 ‘독특한 방식’, 즉 정상 간 담판을 통한 톱다운 방식을 고집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두 번째 북-미 정상회담을 통해 새로운 단계를 열어야지, 실무급이 만나 봐야 무슨 소용이냐는 주장이다. 6·12정상회담 때처럼 당장 회담 날짜와 장소부터 확정하기를 기대하는 것이리라.
껄끄러운 상대를 길들이려는 의도도 다분해 보인다. 북한은 늘 기피 인물에 대해선 극도의 거부감을 드러내거나 의도적으로 회피했다. 성과도 없지 않았다. 북한이 각각 ‘아둔한 얼뜨기’ ‘사이비 우국지사’라고 비난한 마이크 펜스 부통령과 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은 북-미 협상의 뒷전으로 밀려났다. 이들은 최근엔 “북핵 리스트 신고가 정상회담의 전제조건은 아니다” “성과가 있다면 제재 해제를 검토할 수 있다”며 북한을 다독이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도 이런 기싸움엔 이골이 났다. 북한을 어떻게 다룰지 충분히 배웠다. 대북 초강경파가 유연한 태도를 보인 반면 협상을 책임진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요즘 ‘선(先)비핵화’ 원칙만 강조하며 강하게 압박하고 있다. 급기야 북한은 “미 국무성이 조미관계를 불과 불이 오가던 지난해 원점상태로 되돌려 보려 기를 쓴다”며 폼페이오를 직접 겨냥했다. 당혹감의 표출일 것이다.
자존심 빼면 남는 게 없다는 북한이다. 슈퍼파워 미국을 상대하면서도 대등한 대접을 받지 못할 바엔 아예 어깃장을 놓거나 지금처럼 연락두절 자가격리에 들어가 버린다. 우리가 그간 남북 협상에서 익히 보아온 모습이다.
박항서 감독은 베트남 축구선수들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자존심은 강하지만 자신감은 떨어졌다.” 이런 자존심 과잉, 자신감 결여는 수령 독재체제의 북한에 더욱 잘 들어맞는 진단일 것이다. 문제는 거기에서 비롯된 불량한 태도다. 그것이 대외관계에서도 이어진다면 국제사회에서 북한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