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화의 미술시간]〈38〉권력을 향한 충성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2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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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드로 보티첼리 ‘동방박사의 경배’, 1475년.
산드로 보티첼리 ‘동방박사의 경배’, 1475년.
적당한 돈은 안락을 주지만 막대한 돈은 권력을 준다. 은행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메디치 가문은 15, 16세기 피렌체 공화국의 최고 권력자였다. 대를 이어 예술을 후원했던 이 집안은 피렌체에 르네상스 미술이 꽃피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동시대 권력자들의 취향을 작품에 잘 반영할 줄 알았던 산드로 보티첼리는 메디치 가문의 총애와 후원을 한 몸에 받은 화가였다. 이 그림은 보티첼리에게 명성을 안겨준 첫 작품으로 동방박사 세 사람이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러 온 성서의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이제 막 30대에 접어든 화가의 솜씨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탁월한 구성과 생생한 색채, 인물의 사실적 표현이 뛰어난 수작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그림이 좀 이상하다. 예수가 태어난 곳은 가정집의 초라한 마구간이 아니라 폐허가 된 고대 건축물이고, 동방박사를 비롯한 등장인물들의 복장도 예수 시대의 것이 아니라 15세기의 화려한 피렌체 의상이다. 게다가 동방박사 세 사람의 얼굴은 당시 잘 알려진 메디치 가문 사람들이다. 백발에 검은 옷을 입고 아기 예수 앞에 앉은 이는 피렌체의 지배자였던 코시모, 가운데 앉은 붉은 망토를 입은 이는 그의 아들 피에로, 그 옆은 또 다른 아들 조반니다. 그림이 그려질 당시 동방박사로 표현된 이들은 모두 사망했고, 코시모의 손자 로렌초가 살아있는 권력자였다. 그는 화면 맨 왼쪽의 붉은 상의를 입은 젊은 기사로 등장한다. 그렇다면 이 그림은 로렌초가 주문한 걸까? 아니다. 오른쪽 무리들 속에서 자신을 손으로 가리키고 있는 남자, 가스파레 델 라마다. 환전업으로 자수성가한 그는 메디치 가문에 잘 보이고 싶은 마음으로 이 그림을 주문한 것이었다. 최고 권력자를 향한 충성심의 표현이기도 했다.

그럼 화면 맨 오른쪽에서 관객을 응시하며 이 모든 상황을 알려주는 황금색 망토의 사내는 누굴까? 바로 보티첼리 자신이다. 그 역시 후원자였던 메디치 가문에 대한 자신의 충성심을 그림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이은화 미술평론가
#산드로 보티첼리#동방박사의 경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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