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를 못하니 말도 못하게 고생했습니다. 닭고기가 먹고 싶으면 날개를 치는 모습을, 생선 요리가 생각나면 물고기가 헤엄치는 걸 흉내 냈어요.”
1959년 한국 걸그룹 최초로 미국 연예계에 진출한 김시스터즈의 맏언니 숙자 씨(79)는 미국에 처음 오던 날을 ‘깜깜한 밤’에 비유했다. 호텔 몇 개와 먼지 풀풀 날리던 도로만 있던 라스베이거스, 아는 사람이라곤 미국인 매니저뿐이고 언어 음식 문화 모두 낯설었다.
“동생 애자(작고)는 음식이 안 맞아 병이 났어요. 하도 고생을 하니 엄마(‘목포의 눈물’을 부른 가수 이난영 씨)가 깡통에 총각김치를 담아 미국으로 보내주셨어요. 그런데 안 오는 거예요. 공항 직원들이 깡통이 새서 냄새가 심하고 썩은 것 같아 버렸다는 거예요. ‘아, 이 사람들아, 그게 제일 맛있는 건데’라며 발을 굴렀습니다.”
한국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모르는 미국인들의 차가운 시선에 눈물도 흘릴 만큼 흘렸다. “한국에서 들고 온 악보를 미국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 보여줬더니 어설프다고 비웃어요. 하도 억울해 셋이서 구석에서 울었습니다. 일본 여성 단원이 ‘울지 말아요. 당신들은 언젠가 빅스타가 될 겁니다’라고 말해주더군요. 그 말이 참 고마웠습니다.”
실력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무대는 두렵지 않았다. 천재 작곡가로 알려진 아버지 김해송 씨와 어머니 이난영 씨의 무대를 어려서부터 봤고, 가야금 장구 북부터 기타 색소폰 드럼 등 각종 악기를 다뤘다. 발레까지 배워 미국에 왔다. 매일 8시간을 연습에 매달렸다.
“1959년 2월 3일 라스베이거스 스타더스트호텔에서 처음 공연할 때 무대 배경 세트가 잘못돼 쓰러졌어요. 그런데도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공연을 끝내던 우리를 매니저가 보고 ‘이 아이들은 반드시 성공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대요.”
도저히 힘에 부칠 때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걸어 울기만 했어요. 엄마가 ‘숙자야, 무슨 일이 있어도 힘내고 성공해야 한다’고 해요. 전화기에 대고 ‘네, 네, 네’만 반복했습니다. 곁에 있던 매니저가 ‘너희들은 노(No)라는 말은 모르냐’고 하더라고요.(웃음)”
먹고살기 위해 각자의 사연을 안고 미국으로, 중동으로, 전 세계로 떠났던 다른 한국 근로자들과 해외 동포들도 그랬을 것이다. 4주 계약으로 미국 땅을 밟은 김시스터즈는 미국인들로부터 실력을 인정받으며 8개월 반 연장 공연을 하고, 미국 최고의 TV쇼에 출연하면서 ‘케이팝의 전설’이 됐다.
“미국에 와서 엄청난 규모의 후버댐을 보고 ‘저건 도저히 사람 힘으로 지을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한국에서 별을 보며 ‘내가 미국을 갈 수 있을까’ 고민하던 게 생각나더군요. 후버댐이 지어지고 제가 여기서 성공한 걸 보면 ‘꿈을 가지면 누구나 힘이 생긴다’는 걸 알 수 있죠.”
숙자 씨는 데뷔 60주년이 되는 내년 김시스터즈 뮤지컬 제작을 논의하고 있다. 할리우드 유명 제작자 루커스 포스터 씨는 “김시스터즈의 여정은 ‘여러분이 재주가 있고 그것을 믿는다면, 그 꿈을 달성하기 위해 매일 정말 열심히 노력한다면 꿈이 어떻게 이뤄지는지’를 보여주는 완벽한 사례”라고 말했다.
숙자 씨는 자신과 형제들이 3가지 인생의 복권에 당첨됐다고 말한다. 그 3대 복권은 미국에 와서 도전할 수 있었던 것, 미국에서 성공한 것, 미국에서 계속 도전할 수 있다는 것이란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 열풍을 몰고 온 영국 록그룹 퀸의 프레디 머큐리처럼 39년생 숙자 씨도 여전히 외치고 있다. “쇼는 계속돼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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