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한의 전쟁史]〈38〉총통은 숫자만 관심이 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2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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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은 고국인 영국에서도 호불호가 갈리는 인물이다. 다만 짧고 위트 있고 감동적인 문구를 만들어 내는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독일 공군의 공습을 이겨내고 영국을 지킨 조종사들에게 바친 헌사, “전쟁의 역사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적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큰 빚을 진 적은 없다”는 명문장은 지금도 영국 항공전 기념비부터 임피리얼 전쟁 박물관에서 파는 작은 기념품까지 곳곳에 남아 있다.

헤르만 괴링을 수장으로 하는 독일 공군은 공군력으로 영국을 굴복시키겠다는 야심 찬 시도를 했다. 엄청난 항공기가 도버 해협을 거쳐 영국의 주요 도시로 날아왔다.

도버 해협과 영국 창공에서 펼쳐진 영국 항공전은 아마도 SF영화처럼 외계인이 침공해 오지 않는 이상 지구상에서 다시는 벌어지지 않을 드라마틱한 항공전이었다. 이 전투를 배경으로 한 영화 ‘영국에서의 공중결전(Battle of Britain)’은 이 전투에 참전했던 전투기 조종사들이 참가해 항공 액션을 재현했다. 창공을 배경으로 엔진음과 웅장한 오케스트라의 배경음이 어울려 장중한 드라마를 구현한다.

그러나 영국 항공전도 실상을 찾아보면 잘못된 예측, 무모한 작전, 경직된 조직, 무능한 지도자가 실패의 원인이었다. 독일 공군은 처음부터 전략목표 폭격보다는 지상군 지원 능력을 중시했다. 폭격기도 전투기를 따돌릴 수 있는 고속 능력에 치중하다 보니 기체가 가볍고 날렵했다. 폭탄 탑재량은 줄어들고, 대형 폭탄은 적재가 불가능한 구조가 되었다.

이런 폭격기로 도시 폭격을 감행해 영국민을 굴복시키겠다는 작전을 편 것은 낚싯대로 고래를 낚겠다는 발상과 같았다. 여기에 괴링이 치명적인 실수를 더한다. 독일 공군 중에서도 폭격기 제작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사람이 있었다. 괴링은 이렇게 대답했다. “총통께서는 폭격기의 기종보다 수량에 관심이 많으시네.” 경폭격기는 중폭격기보다 빠르게, 많이 수량을 늘릴 수 있었다. 전체주의 국가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일까? 아니다. 민주사회, 우리의 일상에서도 얼마든지 벌어지는 일이다.
 
임용한 역사학자
#윈스턴 처칠#헤르만 괴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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