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석 칼럼]관용과 연대를 동반한 정의, 그게 진짜다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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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가진 인성, 무너지는 유대감… 분노와 분열 심화된 한국 사회
정의 향한 과잉 확신, 불관용의 텃밭… 공감능력과 공동체의식 회복으로
보다 인간적인 사회로 나아가길

고미석 논설위원
고미석 논설위원
어찌 보면 참 심심한 흑백영화다. 현란한 기교도, 막장 양념도 찾기 힘들다. 옆자리 관객은 영화 시작 5분도 안 돼 꾸벅꾸벅 졸더니 도중에 나가버린다. 최근 개봉된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자전적 영화 ‘로마’의 서울 상영관에서의 광경이다. 세밑 BBC가 ‘올해의 영화’ 1위로 꼽고 2019년 오스카상의 후보로 거론되는 이 작품의 배경은 이탈리아가 아닌 멕시코시티의 ‘로마’.

중산층 백인 가정에 입주한 가정부가 그 집 가족들과 모래밭에서 마치 스크럼을 짜듯 한데 부둥켜안은 영화 포스터에 메시지가 압축돼 있다. 고용주와 피고용인 갑을관계에서 인간 본연의 대등한 관계로 바뀌는 순간을 상징하는 영화 속 장면이다. 신분과 처지가 다름에도 상대의 상처와 아픔을 보듬고 역경을 함께 넘는 사람들이 인상적이다. 감독이 자신의 보모였던 분에게 바치는 작품이라 하는데, 국내 영화에서 흔히 그렇듯 강자와 약자를 가해자와 피해자로 일치시키거나, 계층 구분으로 선악을 편리하게 가르는 잣대 따위는 들이대지 않는다. 그 대신, 인간은 완벽하지 않기에 그들의 관계 역시 모순적이고 복잡하다는 것, 누구나 삶에서 벅찬 순간이 있고 그 역경을 버티는 힘은 사람에 대한 연민과 유대감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담담히 일깨울 뿐이다.

한산한 극장 문을 나서면서 지금 한국 사회에서 결핍된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게 된다. 공감 능력과 공동체 의식이 그것 아닐까. ‘갑질’ ‘내로남불’이란 표현은 너무 가볍다 싶을 만큼 살벌하고 흉흉한 일들이 벌어지는 현실은 망가진 인성, 무너진 연대감의 반영이다. 그것은 마음이 고장 난 집단을 향한 엄한 경고처럼 느껴진다. 대기업을 거쳐 중소기업의 오너에 대한 폭로를 통해 ‘엽기적인 그들’의 실태가 세상을 놀라게 했다.

개인의 인격 파탄보다 더 총체적으로 우려되는 것은 ‘적폐청산’ 구호를 넘어 ‘처단’에 대한 집념이 아닌지 의구심이 들게 하는 집권층의 행태다. 모든 문제의 원인을 전 정권 탓으로 돌리고, 정보 유출을 이유로 공무원들 휴대전화를 압수해 사생활을 들춰 보고, 블랙리스트까지 작성하는 ‘갑중의 갑’의 드센 기세에 국민은 눈살을 찌푸린다. 청와대 사찰 논란에 이어 ‘새로 바뀐 정권도 똑같았다’는 전 기획재정부 사무관의 폭로 역시 불길한 예고다. 그 조짐의 신호음은 ‘역시나’다. 같은 잘못을 반복하는 것으로 정의를 바로 세울 수는 없다는 옛말은 진리인가.

우리 앞에 닥친 경제위기만큼 걱정스러운 것이 마음의 위기다. 만성질환으로 진행된 혐오와 노여움, 내 편 네 편에 따라 같은 잘못도 다른 무게로 측량하는 불균형 등 꺼림칙한 징후의 출현 빈도가 잦아진다. 혼돈의 현실에 대한 해독제가 아쉬운 요즘, 얀테의 법칙을 참고할 만하다. 덴마크를 비롯해 북유럽에서 전수돼온 덕목으로 알려진 이 법칙에는 이런 항목이 있다. ‘당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남들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남들보다 더 낫다고 자신하지 말라’, ‘당신이 모든 것을 잘한다고 생각하지 말라’ 등. 성공과 지위에 취해 잘난 척하지 말라는 뜻이자, 다 함께 잘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독주하는 것보다 소중하다는 정서다. 거친 바다에서 생존을 위해 투쟁한 바이킹의 후예들은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의존하는 공동체의 본질과, 모두 힘을 합쳐야 가장 좋은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체험으로 터득했나 보다.

인류 역사에서 지향점이 다른 세력 간 갈등은 무한 반복된다. 1925년 미국 역사가 헨드릭 빌럼 판론이 ‘무지와 편견의 세계사’를 쓴 것도 인간의 어리석음과 광기에 맞서는 관용의 가치와 실천을 알리기 위해서다. 적절한 ‘자기 의심’도 없는, 공정과 정의에 대한 지나친 ‘자기 확신’은 불관용의 온상이 된다는 혜안도 거기 담겨 있다. ‘스스로는 공격받을 우려가 없는 안전한 곳에서 퍼붓는 공격, 나는 때려도 되고 남은 안 된다는 자세.’ 어느 일본 작가는 사회에 퍼진 악(惡)과 불공정을 설명하면서 그런 예를 든 적이 있다. 이런 자기중심적 심보에서도 불씨는 타오를 것이다.

새해도 우리 앞에는 여전히 가파른 길이 예상된다. 행동을 바꾸려면 먼저 마음을 고쳐먹어야 한다. 각 종교 지도자들은 신년사에서 타인에 대한 배려, 존중, 사랑과 연대를 강조했다.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그래서 부디 소망한다. 한국 사회가 보다 인간적인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정의는 좋다. 다들 알고 있다. 관용과 연대의 정신을 동반하는 정의는 더욱 좋다. 잘들 모른다. 그게 진짜임을.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
#올해의 영화#로마#흑백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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