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걸크러시]〈17〉여종, 희대의 명창이 되다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월 8일 03시 00분


“석개는 우물에 가서 나무 물통을 우물 난간에 걸어 놓고는 종일 노래만 불렀다. 그러다 날이 저물면 빈 통을 가지고 돌아왔다. 매를 맞아도 그 버릇을 고치지 않고 다음 날도 똑같이 하였다. 하지만 그 노래는 곡조를 이루지 못해 나무꾼이나 나물 캐는 아녀자들이 부르는 수준 정도였다.”

―유몽인의 어우야담(於于野談) 중 ‘명창 석개’ 중에서

석개는 중종의 셋째 서녀(첩에게서 태어난 딸)인 정순옹주(貞順翁主)와 결혼한 송인(宋寅·1517∼1584)의 여종이다. 그는 그리 아름다운 편은 아니었다. 얼굴은 늙은 원숭이처럼 생겼고, 눈은 좀대추나무로 만든 화살같이 찢어졌다. 송인 집안은 임금의 외척이며 부자였기에 미인들이 좌우에서 그를 받들어 모셨다. 그러니 석개에게는 물 길어 오는 일 정도가 맡겨졌다.

석개는 노래가 좋았다. 여종으로서 맡은 일도 잊은 채 노래만 불렀다. 매를 맞아도 좋았다. 단순히 노래를 즐기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더욱 노력했다.

유몽인은 그의 노력을 “나물을 캐오라고 광주리를 들려 야외로 내보냈다. 석개는 광주리를 들판에 놓아두고 작은 돌멩이를 많이 주워 모았다. 그러고는 노래 한 곡을 부를 때마다 돌멩이 하나를 광주리에 집어넣었다. 광주리가 가득 채워지면, 노래 한 곡 부를 때마다 광주리 속의 돌멩이 하나를 밖으로 집어 던졌다. 이러기를 두세 차례 반복하다가 날이 저물면 빈 광주리로 돌아왔다”는 내용으로 정리했다.

물론 석개는 이때도 매를 맞았다. 하지만 여기서 석개의 열정을 엿볼 수 있다. 배운 적 없어 곡조도 모르지만 석개는 노래 부르기를 멈추지 않았다. 이 정도면 발성이나 성량 면에서 다른 사람이 따라올 수 없는 튼튼한 기초를 갖췄을 것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였던가. 석개가 노래를 부른다는 사실을 주인인 송인이 알게 됐다. 송인은 이를 기특하게 여겨 노래를 배우게 했다. 성량이 갖춰진 상태에서 음악 교육을 받은 석개는 곧 장안의 제일가는 명창이 됐다. 석개의 성공 스토리를 기록한 유몽인도 ‘이런 일은 근래 100여 년 동안 없었다’며 감탄했다.

석개는 비단옷을 차려입은 채 수놓은 말안장에 앉아 날마다 연회에 불려갔다. 그 자초지종을 심수경(沈守慶·1516∼1599)의 견한잡록(遣閑雜錄)에서 볼 수 있다. 심수경은 “석개는 당시에 견줄 사람이 없을 정도로 가무에 뛰어났다. 이에 영의정이었던 홍섬(洪暹)이 절구 3수를 지어 주었다”라고 적었다.

공연의 대가로 받은 돈과 비단은 점점 쌓여만 갔다. 석개의 딸 옥생(玉生)도 좋은 유전자를 물려받아서인지 어머니를 이어 당대 최고의 가수가 됐다. 이안눌(李安訥·1571∼1637)이 “칠아가 늙고 석개가 죽으니, 요즈음의 명창은 옥생이다”라고 시를 읊을 정도였다.

그렇다면 석개는 행복하게 살았을까. 이유는 모르지만 석개는 자기 뜻을 따르지 않는다며 권세가의 사내종을 관아에 고소했다가 그에게 살해당했다. 성공한 석개가 어려웠을 때의 초심을 잃고 심하게 대한 결과인지, 사내종에게 문제가 있었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조선시대 입지전적 인물인 석개의 비극적인 죽음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임치균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유몽인#어우야담#명창 석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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