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진영]보이지 않아도 달린다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월 11일 03시 00분


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김미순 씨(58)는 마라토너다. 15년간 동아마라톤을 포함해 공식 대회 풀코스 340회, 100km가 넘는 울트라 마라톤 75∼80회를 달렸다. 국내 울트라 마라톤 그랜드 슬램(강화∼강릉 308km, 부산∼임진각 537km, 해남∼고성 622km)을 2회 달성했는데 여성으로는 처음이고, 시각장애인으로도 처음 세운 기록이다. 앞이 보이지 않는 김 씨는 동갑내기 남편과 손잡고 달린다. 채널A ‘뉴스A라이브’의 새해 첫 인터뷰 주인공으로 화제가 된 그를 만나러 부부가 운영하는 인천의 카센터를 찾았다. 김 씨는 따뜻한 차를 끓여냈다.

―오늘도 산을 넘어 출근하셨나요.

“네. 매일 남편과 손잡고 5.5km를 걸어 청량산을 넘어와요. 남편이 차를 수리할 때 저는 2시간 동안 스트레칭하고, 윗몸일으키기 120회 하고, 아령으로 근력 운동을 해요. 언제든 달릴 수 있도록 몸을 만드는 거죠. 공부는 몰라도 운동엔 벼락치기가 없어요.”

―마흔이 넘어서 마라톤을 시작하셨죠.

“출산 후 희귀 질환인 베체트병에 걸려 마흔에 전맹(全盲)이 됐어요. 몸과 마음을 추스르려고 헬스장에서 운동하다 마라톤을 시작했죠. 어둠 속에 갇혀 지내다 밖으로 나오니 살 것 같았어요.”

―부부가 늘 손잡고 뛰던데요.

“시각장애인은 가이드 러너가 있어야 해요. 남편이 저를 위해 마라톤을 시작한 거죠. 뛰다 보면 서로 알아요. 남편은 제 얼굴 보고 알고 저는 남편 손 감촉으로 알고요. 아 이 사람이 힘들구나, 싶으면 서로 속도를 늦춰주고 다독이며 함께 달리죠.”

―마라톤 풀코스도 어려운데 울트라 마라톤까지….

“부산∼임진각 종단 코스 537km를 107시간53분에 완주하고는 둘이 안고 펑펑 울었어요. 손잡고 뛰다 보니 속도가 느려 5일간 길에서 쪽잠 자고 달렸어요. 한 걸음 한 걸음이 모여 이 먼 거리를 달려왔다니 너무나 신기했죠. 찌그러져 지내다 느끼는 자신감과 충만함이란…. 풀코스는 기록이 중요하니 다들 앞만 보고 뛰어요. 반면 울트라는 옆도 보고 뒤도 돌아보며 뛰죠. 다리에 쥐가 난 사람을 보면 주물러주고, 목말라하면 한 모금 남은 물병을 내줘요.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배우게 되죠.”

―다양한 코스의 차이를 느낄 수 있나요.

“그럼요. 공기와 냄새가 다르니까요. 그리고 남편이 다 말해줘요. 여긴 진달래가 피었네, 앞에 달리는 사람은 무슨 색 옷을 입었네, 방금 지나친 나무는 무엇이고, 이제 곧 바다다, 계단이 시작된다, 끝이다…. 코스를 떠올리면 눈앞에 다 그려져요.”

―가톨릭 신자이시죠. 왜 실명이라는 시련을 주셨을까요.

“교만하지 말라는 뜻 아닐까요. 희귀병 진단을 받고 10년 안에 실명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납득할 수 없었어요. 성실하게 살아온 내가 왜? 하늘이 정하면 거부할 수 없고, 모든 노력이 정당한 대가를 받는 것도 아니라는 걸 인정하기까지 10년이 걸렸죠. 내 자존심 걱정, 남 시선 걱정하느라 그 시간을 허비한 게 후회돼요.”

―소설가이자 마라토너인 무라카미 하루키의 마라톤에 관한 책에 이런 구절이 나와요. ‘아픔은 피할 수 없지만 고통은 선택하기에 달렸다.’

“맞아요. 달리기는 누구에게나 힘든 일이지만 이대로 주저앉을지 말지는 내가 결정하는 거예요. ‘그만 뛰고 싶다’는 유혹이 끝없이 밀려와요. 이걸 참아내면 가는 거고, 못 참으면 신발 벗는 거죠. 전 계속 달리기로 했습니다.”
 
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ecolee@donga.com
#동아마라톤#마라토너#마라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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