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전쟁 당시 미군의 지휘권은 둘로 나뉘어 있었다. 육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와 해군 사령관 체스터 니미츠였다. 이 기상천외한 지휘권 분할은 육군과 해군의 전통적인 기싸움이 원인이었지만 두 사령관의 상반된 개성도 작용했다.
맥아더는 3대 군인인 명문가 출신이었다. 조부는 주지사였고, 부친은 필리핀 총독을 지낸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장군이었다. 너무 인기가 높은 탓에 정치권의 견제를 받아 참모총장이 되지 못하고 퇴역했다고 한다.
반면 니미츠는 텍사스의 시골 여관집 아들이었다. 그가 살던 마을은 서부극에 흔히 나오는 거리와 꼭 닮았다. 그는 여관에서 일하며 고등학교를 다녔다. 맥아더가 가문의 후광에 힘입어 승진했다면 니미츠는 노력과 겸손, 인화로 출세했다. 니미츠의 인화력은 대단했다. 맥아더를 만나면 추종자가 되거나 적이 된다는 말이 있는데, 니미츠는 좋아하는 사람과 존경하는 사람으로 나뉘었다. 맥아더에게는 사람을 긴장하게 만드는 일화가, 니미츠의 전기에는 훈훈한 스토리가 많다.
니미츠는 여관에 숙박했던 한 장교에게 감화받아 사관학교행을 결심했다. 당시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려면 지역 의원의 추천장이 필요했다. 니미츠는 생면부지의 제임스 슬레이든 하원의원을 찾아갔다. 당시 미국은 지금 우리보다 훨씬 더한 인맥사회였다. 슬레이든의 추천장은 이미 친인척, 친구 아들의 추천에 다 소비되고 없었다. 슬레이든은 군인 자제들조차도 정원이 꽉 차서 대기 중이므로 추천해주기 어렵다고 말했다.
실망한 니미츠가 돌아서는데 슬레이든이 그를 불렀다. “이보게 해사는 어떤가? 해사라면 내가 추천해줄 수도 있는데….” 니미츠가 텍사스 출신인 것이 천운이었다. 텍사스 레인저스(특수부대)의 전통 덕분인지 텍사스 출신 장교 지망생들이 과하게 육사로 편중됐다.
그러나 텍사스 출신이라 할지라도 해군사관학교의 추천장을 부탁하는 사람이 과연 없었을까. 슬레이든은 정실 인사를 단호히 거부하는 정의로운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불쑥 나타난 청년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해사에 천거하는 최소한의 사명감과 양심은 있었다. 요즘 청년에게 각박한 우리는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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