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이었던 성재 이시영은 오성대감이라고 불렸던 백사 이항복의 10대 직계손이다. 이항복 집안은 6명의 영의정과 1명의 좌의정을 배출한 조선 최고의 명문가였다. 선생은 일찍부터 관직생활을 시작해서 평안남도 관찰사, 한성재판소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나라를 빼앗기자 건영, 석영, 철영, 회영, 시영, 호영 등 6형제와 가족 50여 명은 전 재산을 처분하고 중국으로 망명해 항일투쟁에 나선다. 당시 처분한 재산이 현재 시가로 2조 원에 달한다고 한다. 선생은 형 이회영과 함께 독립군 양성학교인 신흥강습소 설립에 주도적 역할을 했고 이회영, 이동녕과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해 법무총장, 재무총장을 맡기도 한다. 오랜 망명 생활 중 5명의 형제는 중국 땅에서 모두 죽고 선생만이 살아남아 광복된 조국에 돌아왔다.
선생의 글씨에서 꾸밈이 없는 천진함이 느껴진다. 한마디로 대교약졸(大巧若拙)이라는 말처럼 연미하고 유려하지는 않지만 기교를 뽐내지 않으며, 언뜻 보면 어눌한 듯하나 자주 대하면 달빛에 매화향기가 떠다니는 것처럼 은은한 맛을 느낄 수 있다. 글씨의 속도가 느린데 이는 정확하고 꼼꼼하며 사려가 깊지만 즉흥성이 부족함을 의미한다. 또 필획이 야위거나 메마르지 아니하고 살찌면서 부드러움을 내포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인자하고 후덕한 인품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원필을 구사하고 글씨가 작아서 대중과 타협할 수 있는 현실감각과 사회감각을 드러내고 있다. 정사각형 형태, 곧은 선, 유연성, 규칙성에서 뿌리 깊은 학자의 풍모가 느껴지고 보수적이며 올곧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행의 간격이 때로는 좁고 다른 글자를 침범하는 경우도 있다. 이를 보아 호락호락하지 않고 할 말이나 할 일은 하는 강단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구본진 변호사·필적 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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