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저한송(澗底寒松)’이란 말이 있다. 시냇가의 찬 소나무. 덕과 재주가 높음에도 말단 지위를 전전하는 인재를 의미한다. 훌륭한 글을 상징하는 ‘낙양(洛陽)의 지가(紙價)를 올린다’는, 고사의 실제 주인공이었던 중국 진나라 좌사(左思)가 쓴 시 속의 ‘울창한 시냇가 소나무, 빽빽한 산 위의 묘목(鬱鬱澗底松 離離山上苗)’에서 유래된 단어다. 능력도 없이 가문의 위세를 업고 고위직을 독차지하는 산꼭대기 묘목과 대조를 이룬다.
훈민정음 해례본, 고려청자,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 그림 등 국보급 문화재가 해외로 빼돌려지는 것을 막은 전형필 선생의 호 간송(澗松)이 여기서 나왔다. 정민 한양대 교수가 ‘조심’이라는 책에서 밝힌 내용이다. 그는 “간송은 우뚝한 의기로 귀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을 일본인의 손에서 지켜냈다”며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길을 걸은, 천년 냇가 외로운 소나무의 기상”이라고 표현했다.
최 부자 집으로 유명한 경주 교동 최씨 고택 사랑채엔 ‘둔차(鈍次)’라고 쓰인 커다란 편액이 걸려 있다. ‘재주가 둔한 2등’이란 뜻으로 마지막 최 부자인 최준의 부친 최현식의 호다. 이 집안 가훈을 정리한 육훈(六訓) 중 첫 번째인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않는다’와 맥을 같이한다. 지금으로 치면 고위 직급의 공무원은 되지 말라는 얘기다. 이런 낮은 자세의 겸손함이 최 부자 집이 300년 동안 만석꾼 재산을 유지한 비결이었다.
‘간송’과 ‘둔차’는 2등의 삶을 얘기한다. 이런 삶은 1등보다 훨씬 가치 있다.
같은 듯 다르지만 2인자의 삶도 있다. 한국 현대사에서 2인자의 상징 격인 고(故) 김종필(JP) 전 총리가 대표적이다. JP가 자서전에서 밝힌 2인자론이다.
“2인자는 첫째 절대 1인자를 넘보지 말고 품격을 유지하면서 고개를 숙여야 한다. 둘째 성의를 다해서 보좌하는 인상을 주면서 아무리 억울한 일이 있어도 참고 견뎌야 한다. 진정한 인내는 참을 수 있는 것을 참는 것이 아니라, 참을 수 없는 것을 참는 것이다.”
JP는 1인자들보다 훨씬 오랜 기간 권력을 향유했다. 그런 면에서 JP의 2인자론은 정치적인 처세로는 적절할지 모른다. 하지만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조직에서는 ‘글쎄요’다.
조직의 2인자는 통상 바이스 프레지던트(vice president·부통령 또는 부사장)처럼 직책에 바이스가 붙은 사람들이다. 영어로 바이스는 ‘대리’라는 뜻보다는 악, 부도덕 같은 부정적인 의미로 많이 쓰이는 단어다. 2인자는 조직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궂은일을 담당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1인자가 조직을 대표해 외부로 뛰고, 2인자가 내부의 궂은일을 맡아 한다면 그 조직은 1, 2인자가 절묘하게 보완 기능을 하는 이상적 구조다. 궂은일을 잘 해낸 2인자가 다음 기회에 1인자로 올라간다면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통상 2인자의 역할이 모호하다. 그러다 보니 1인자와 충돌하면서 집안싸움을 일으키는 경우가 허다하다. ‘1등만 알아주는 세상’이어서인지, 2등이나 2인자에 대한 연구와 교육이 부족한 탓도 있다. 이제 그런 공부도 필요한 때가 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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