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걸크러시]〈20〉이춘풍이 임자를 만났다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월 29일 03시 00분


“한 여자가 스스로 남자 옷을 입고 비장(裨將)이 되어 평양에 내려갔다. 그러고는 추월을 혼내주고, 이춘풍처럼 허랑방탕한 남편을 데려왔으며, 호조에서 빌린 돈도 갚았다. 이후 부부가 종신토록 해로하였다. 이 일을 대강 기록하여 후세 사람들에게 전하니, 여자 된 사람은 김씨를 본받으라.”

―고전소설 ‘이춘풍전’ 중에서

여자들이 본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김씨는 어떤 여자일까? 고전소설 ‘이춘풍전’의 여주인공 김씨는 언행이 허황하고 착실하지 못한 이춘풍의 아내다. 이춘풍은 경성 부잣집 외아들이었지만 부모가 죽자 기방에서 주색잡기로 재산을 탕진한다. 생활력 강한 김씨는 집안 살림을 자기에게 맡긴다는 각서를 받는다. 그러고는 바느질, 길쌈 같은 고된 일로 500냥을 모았다. 그런데 철없는 이춘풍이 호조에서 2000냥을 빌려 평양으로 장사하러 가겠다고 나섰다. 김씨의 500냥까지 빼앗아 떠나버렸다.

김씨는 남편이 돈을 불려 돌아오기를 고대했으나 평양 제일의 기생 추월에게 홀려 모든 돈을 다 쓰고 종살이를 한다는 소문이 경성까지 들렸다. 김씨는 2500냥이라는 큰돈을 날린 것도 기가 막혔지만 기생에게 속은 남편에게 더 분통이 터졌다. 마침 뒷집의 김승지 아들이 평양 감사가 되자, 김씨는 감사 어머니와의 친분을 이용해 비장(裨將)이 된다. 비장은 감사를 따라다니며 일을 돕는 벼슬이다.

김씨가 평양에 도착해 제일 처음 한 일은 추월의 집에 가는 것이었다. 그 집에서 목격한 이춘풍은 머리는 덥수룩하고, 얼굴에는 때가 껴 있었으며, 얼룩덜룩 기운 누더기 옷을 입고 있었다. 자기에게는 온갖 위엄을 부리며 호령하던 사람이 추월의 하인이 된 것에 억장이 무너졌다. 다음 날 김씨는 이춘풍을 불러 호조 돈을 안 갚은 죄로 곤장 10여 대를 때리고, 추월도 50여 대를 친 후 이춘풍에게 5000냥을 갚게 했다.

이쯤 했으면 남편도 잘못을 뉘우칠 법하다. 그러나 자기 아내 덕에 큰돈을 얻게 된 것도 모른 채, 예전의 방탕한 모습 그대로 돌아간다. 집에 돌아온 이춘풍은 자기 능력으로 큰돈을 번 것처럼 거들먹거린다. 김씨는 다시 한 번 비장으로 변장해 나타난다. 그런 후 흰죽을 쑤어 오라고 한다. 아내가 없기에 어쩔 수 없이 이춘풍은 직접 죽을 만들어 대접한다. 비장 김씨가 먹는 척하다 이춘풍에게 건네주며 하는 말이 압권이다.

“네가 추월이 집에서 종살이할 때에는 다 깨진 사발에 눌은밥과 국을 부어 숟가락도 없이 뜰에 서서 되는 대로 먹었다. 그때를 생각하며 이 죽을 다 먹어라.” 여전히 눈치 없는 이춘풍은 아내가 볼까 재빨리 죽을 먹는다. 김씨는 옷을 갈아입고 자신이 비장이었음을 고백한다. 그제야 이춘풍은 잘못을 뉘우치고 방탕한 생활을 청산한다.

김씨는 무능하고 허위에 가득 찬 남편을 직접 질책하기보다 슬기롭게 계획을 세워 스스로 깨우치도록 했다. 호조에서 빌린 돈을 갚고, 노비와 전답을 마련해 풍족하게 살아갔다는 결말은 모두 유능한 김씨 덕분이다. 무너진 집안을 일으켰다는 것보다 남편의 성격을 영리한 방법으로 개조한 김씨의 지혜와 활약이 돋보인다.
 
이후남 전주대 강사·국문학 박사
#이춘풍전#이춘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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