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박보검과 송혜교가 나오는 드라마 ‘남자친구’에 빠져 있다. 두 사람이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감정이입이 잘 안 된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내는 오로지 박보검만 집중해서 보기 때문에 감정이입 따위는 상관없다고 했다. 드라마 초반에 송혜교가 박보검을 처음 보고 “누굴까? 청포도 같다”라고 말하는데 아내는 그 대사를 듣고 감정이입이 됐는지 “아, 너무 설레”라며 탄성을 터뜨렸다. 나는 괜히 약이 올라서 아내에게 물었다.
“그럼 나는 뭐 같아?”
“음, 곶감.”
곶감이라니. 단감도 아니고 홍시도 아니고 곶감이라니. 가뜩이나 40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얼굴에 수분도 많이 빠지고 새치도 듬성듬성 나기 시작해서 속상해 죽겠는데, 곶감이라니. 며칠 후 친구 부부와 저녁 자리에서 ‘청포도’와 ‘곶감’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나는 친구의 상태가 궁금해서 제수씨에게 물어봤다.
“저는 곶감인데, 얘는 뭐 같아요?”
“음, 먹태요.”
생태도 아니고, 동태도 아니고, 먹태라니. 제수씨는 농담이라고 했지만 친구의 얼굴은 이미 먹태처럼 말라비틀어져 있었고 그날따라 유난히 푸석푸석해 보였다. 곶감은 그래도 쫀득함이라는 최소한의 수분을 가지고 있는데, 먹태는 그냥 부서지면 가루일 뿐. 나는 그냥 곶감에 만족하기로 했다.
아내가 ‘남자친구’라는 드라마에 빠져 있다면, 5학년이 되는 딸은 ‘에이틴’이라는 웹드라마에 빠져 있다. 요즘 아이들은 드라마도 유튜브나 네이버TV로 보기 때문에 아이들에게는 웹드라마가 인기가 많은 것 같다. 사랑이라고 하기엔 좀 어설프지만, 청포도 같은 첫사랑 이야기가 10대들에게 공감을 얻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아내와 딸이 드라마를 보는 방식에서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딸은 엄마가 보는 드라마를 왜 보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이유는 송혜교가 송중기와 결혼했는데 왜 박보검이랑 연인으로 연기하는지, 그냥 거짓말처럼 느껴져 재미가 없다고 했다. 아내는 딸이 보는 드라마를 이해할 수가 없다고 했다. 이유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젊은 배우들이 나와서 연기하는 모습이 전혀 드라마 같지 않고 독립영화 같아서 드라마라고 하기엔 너무 낯설다고 했다. 그래서 아내는 거실에서 드라마를 보고 딸은 자기 방 책상에서 드라마를 본다. 이런 현상은 우리 집에서만 벌어지고 있는 일이 아니다. Z세대(1990년대 중반에 태어난 디지털 환경에 익숙한 세대)라 불리는 10대들이 TV를 떠나고 있고 TV는 점점 늙고 있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대학생이 문화를 선도했기 때문에 그들이 듣는 음악, 입는 옷, 자주 가는 곳이 유행을 했는데 요즘은 중학생이나 초등학생이 문화를 선도한다. 방탄소년단(BTS)도 그런 현상 중에 하나고 어른들은 잘 모르는 유튜브 스타가 탄생하는 것도 이런 현상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청포도’와 ‘곶감’ 이야기가 어쩌다가 웹드라마와 TV 드라마로 흘러왔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이 청포도와 웹드라마의 시대인 건 확실하다. 그런데 이거 하나는 알아야 한다. 곶감도 한때는 딱딱하고 떫은 감이었고, 홍시를 거치고 세월을 견뎌 곶감이 됐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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