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내게 존경하는 한국인이 있느냐고, 그게 누구냐고 물어본다면 서슴없이 나는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과 간송 전형필 선생, 그리고 혜곡 최순우 선생이라고 하겠다. 한국의 민주화와 천주교를 위해 애쓰신 추기경, 한국 문화재를 지켜주신 간송, 그리고 그 문화재들의 의미와 가치를 학자는 물론 일반인에게도 잘 가르쳐주신 혜곡이기 때문이다.
나는 얼마 전 ‘삼일운동 100주년 간송특별전 대한콜랙숀’을 다녀왔다.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난 독립운동으로부터 올해가 100년이 된 것을 기념하며 간송(1906∼1962)의 수집품을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 전시하는 행사다. 이번 전시는 ‘알리다’, ‘전하다’, ‘모으다’, ‘지키다’, ‘되찾다’라는 다섯 개의 섹션으로 구성되어 있다. ‘알리다’와 ‘전하다’ 섹션은 한국 최초의 민족사학인 보성고등보통학교와 이 학교 출신 인물들의 소개, 간송 선생의 공적과 간송미술관의 역사가 자하 하디드의 설계로 세워진 DDP의 현대적인 건축미에 어울리게 가상현실(VR) 체험, 영상 등을 통해 설명되어 있어 전시장을 찾는 일반인, 특히 젊은 세대가 다가가기 쉽게 꾸며져 있다.
‘모으다’에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보화각(간송미술관의 전신)을 통해 고려청자의 대표 작품인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의 실물과 그 뒤에 숨겨져 있던 수장하게 된 뒷이야기를 엿볼 수 있다. 또 자칫 불쏘시개가 될 뻔한 겸재 정선의 ‘해악전신첩’을 소장하게 된 경위도 알 수 있게 꾸며져 있다.
‘지키다’는 당시 합법적인 문화재 반출구였던 경성구락부로부터 유출을 막은 많은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이전 성북동에서와는 달리 DDP의 높은 천장과 전문적인 조명으로 본 유물들은 또 다른 느낌을 준다. 무심코 봤던 소 모양의 제기인 ‘백자희준’은 생명력이 넘쳐 보였고, 코발트빛의 기와집 모양인 ‘백자청화철채산수문가형연적’은 그 아름다움이 눈에 쏙 들어왔다.
마지막 섹션인 ‘되찾다’는 ‘존 갇스비 콜랙숀’을 한꺼번에 감상할 수 있어 즐겁다. 이 전시실에서는 전기 작가 이충렬의 소설 ‘간송 전형필’(2010년)의 한 장면이 눈앞에 떠오른다. 소설 속에서 개즈비는 갑자기 조선에서 온 젊은 간송이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을 매입한 사람임을 알고 나서 놀라워하며 자신의 소장품을 하나둘씩 꺼내기 시작했다. 먼저 ‘청자원숭이형연적’부터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간송은 이 원숭이를 바라보며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꺼내놓은 유물들을 한 개씩 한참 동안 살펴봤다. 이 소설에는 간송이 유물을 수장하는 데 여러 가지로 협조했던 일본인도 등장해 당시의 상황을 생생히 느낄 수 있도록 묘사되어 있다.
내가 한국 예술에 처음 관심을 가졌던 것은 고려불화와 청자 때문이었다. 그래서 한국에 처음 온 1980년대 중반부터 간송미술관의 전시를 거의 빠짐없이 다녔다. 간송미술관은 한국에서의 추억이 가득한 곳이다. 성북동에 위치한 한적한 마당 가운데 솟아있는 하얀 건물. 버스에서 내려 성북초 정문 골목으로 꺾으면 야트막한 언덕길 끝에 미술관 정문이 보이고 내 가슴은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문을 들어서면 토종닭이나 공작새, 계절마다 달리 피는 꽃들 사이로 걷게 된다. 봄이면 이름을 알 수 없는 꽃들이, 가을에는 꽃들은 물론 아름답게 물든 단풍과 발갛게 익어가는 감들이 나를 맞아줬다. 그 길을 걷다 보화각 정문에 다다르면 현관 양쪽에 앉아있는 돌사자와 붓으로 쓴 전시제목과 보화각의 현판이 전시장에 들어서는 나의 마음을 다시 가다듬게 한다.
전시실은 또한 그 역사가 깃든 특별한 공간이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것은 유리진열장이다. 살며시 굴곡져 보이는, 처음 만들어졌을 당시 그대로의 진열장. 이 진열장의 옛 유리를 통해 작품들을 감상하다보면 유물들이 유일무이한 존재로 내게 다가온다. 높은 안목과 강한 의지로 한국의 훌륭한 미술품을 구입해 해외 반출을 막고 1938년에 최초의 사립미술관을 세워 연구·보존해온 업적에 머리가 절로 숙여진다. 간송이 돌아가신 지금까지도 그의 정신을 계승한 연구자와 후손들이 소장품을 보존하고 공개해왔다는 것은 훌륭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간송미술관이 DDP에서 전시를 시작한 지 5년이 지났고, 이번 전시를 마지막으로 성북동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이르면 올가을부터 다시 예전처럼 전시를 한다는 소식이다. 지금부터 그 가을이 못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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