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나무 아래서]〈21〉백 가지 사과, 혀가 꿈꾸는 백 가지 상상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2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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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신이현 작가
신이현 작가
“시드르가 없다고? 그렇다면 칼바도스도 없겠구나. 그러니까 사과술들 말이야. 사과 케이크나 파이도 없다는 거야? 사과를 졸여서 먹는 콩포트는? 이건 정말 맛있는데 왜 없지?”

레돔이 한국에 와서 처음 사과를 먹었을 때의 반응이었다. 1990년대 중반이었다. 그가 먹은 것은 홍옥이었고 그 새콤한 맛에 반했다. 당연히 맛있는 시드르도 있겠지? 했는데 그것이 술인 줄도 모르는 나를 보고 좀 놀라워했다.

“그러니까 우리에겐 생으로 먹을 사과도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싶어.”

사과에 대한 나의 첫 기억은 초등학교 때였다. 어른들은 우리 동네 여자아이들은 사과를 많이 먹어서 다들 예쁘다, 라는 말을 하곤 했다. 그러나 나는 사과를 먹어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감을 많이 먹었다. 감꽃, 소금물에 삭힌 풋감, 홍시, 얼어붙은 겨울 감, 사계절 내내 어찌나 감을 먹었던지 변을 보지 못해 엉엉 우는 아이들도 많았다.

감을 언제 처음 먹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과를 처음 먹어본 날은 선명하게 기억한다. 그날따라 왠지 사과밭 쪽이 궁금해서 갔더니 바닥에 떨어진 사과 한 알이 보였다. 얼른 그것을 주워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강까지 걸어가서 깨끗이 씻은 뒤 커다란 바위 위로 올라갔다. 강물에 반짝이는 햇빛을 보며 사과를 한입 깨물었다. 흘러내리는 새콤달콤한 즙이 내 입안을 흥건하게 적시며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뭐라고 할까, 아삭아삭 소리와 함께 넘어가는 그 맛은 혓바닥뿐 아니라 나의 뇌 속 오만가지의 감각을 다 일깨워 주는 느낌이 들었다. 씨앗과 꼭지까지도 다 먹어버렸다. 그런데 그 사과의 품종이 뭔지 그때도 몰랐고 지금도 알 수가 없다.

“그렇다면 노르망디에 가볼 필요가 있어. 거기엔 백 가지가 넘는 사과가 있으니 그때 먹은 그 사과 맛을 찾을 수 있을 거야. 물론 시드르도 마셔야지.”

파리의 슈퍼마켓에서도 시드르를 살 수 있지만 그것들은 공장에서 만든 싸구려이기 십상이다. 진짜 시드르를 마시려면 프랑스 노르망디나 브르타뉴 지방으로 가야 한다. 이곳 농부들은 사과로 최고의 술을 만들어 그 기술을 자자손손 전해주었다. 시드르뿐 아니라 메밀 크레프도 만들었다. 사람들은 시드르와 메밀 크레프를 먹기 위해 그곳에 간다. 까칠한 메밀 크레프에 사과주 특유의 시큼하게 콕 쏘는 시드르를 마셨을 때 묘하게 어울리는 그 맛에 순간적으로 뇌에 반짝 전기가 들어왔다. 그때 무엇인가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당신 나라엔 백 가지 맛이 다른 사과가 있어 백 가지 상상을 할 수 있는 것 같아.”

우리의 혀는 온갖 종류의 맛을 느끼고 그 풍성한 느낌이 뇌로 가서 상상력이라는 꽃으로 피어난다. 그러나 우리는 크고 달콤하고 저장성이 좋은 과일만 선호한다. 사과든 수박이든 복숭아든 모든 과일이 크고 달콤한 것 위주로 남아있다. 소수의 입맛을 위한 것은 사라져 버렸다. 떨떠름하거나 시큼하거나 민숭민숭하거나 쓴, 납득할 수 없는 맛의 사과는 없다. 지금 시장에 가면 똑같은 사과밖에 없다. 혀도 점점 둔감해지고 뇌도 단순화된다.

“똑같은 맛의 사과를 먹고, 똑같은 생각을 하고,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직업을 가지고…. 그러다 보니 좀 이상하다 싶은 남은 이해를 못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 노벨 문학상도 나오고 에디슨이나 아인슈타인 같은 괴짜 과학자도 나와 줘야 하는데 큰일 났네.”

이상야릇한 맛의 과일을 먹고, 이상야릇한 생각을 하고, 이상야릇하게 살고 싶다. 그런데 맛있기만 한 과일밖에 없다고 푸념하니 레돔은 노벨 문학상보다 더 급한 것이 있다고 한다.

“진짜 심각한 것은 미래에 닥칠 기후변화에 대비할 품종이 없다는 거야. 한국 기후에 병들지 않고 잘 자랄 사과나무와 포도나무를 구하고 싶어. 어떻게 하면 사라진 한국의 옛 과일 품종들을 찾아서 온갖 잡풀 속에서도 잘 자라게 할 수 있을까?” 이런, 그는 언제나 내가 풀 수 없는 문제만 낸다. 일단 사과주부터 한잔 마시고 생각해 봐야겠다.
 
신이현 작가

※ 프랑스인 남편 도미니크 에어케 씨와 충북 충주에서 사과와 포도 농사를 짓고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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