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화제가 됐던 한 드라마를 보면서 조선시대 과거제도가 떠올랐다. 당시엔 고급 관리가 되는 것만이 유일한 출셋길이었던 만큼 유생들은 과거에 목숨을 걸었다. 그러다 보니 이름 있는 양반집에선 사교육이 성행했고, 시험을 대신 봐주거나 시험 문제를 미리 알아내는 등 편법과 탈법이 넘쳐났다. 조선 후기엔 이런 폐단으로 나라의 근간이 무너지고 있다는 상소가 잇따랐을 정도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과도한 사교육과 편법은 사회질서를 흐리는 큰 문제다. 하지만 성공을 위한 방법이 ‘공부’였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학문을 중시해온 전통 때문인지 공부로 평가한 것만이 객관적으로 인정받았을 것이다. ‘공부만이 살길’이라는 우리 민족의 뿌리 깊은 ‘교육 DNA’는 아마 그렇게 생겨난 것일지도 모른다.
실제 삼국시대 이후 외국인의 눈에 비친 우리 모습에서 빠지지 않는 것은 공부였다. 다른 나라에선 찾아보기 힘든 특이한 광경이었다. 중국 당나라 역사책인 ‘구당서’와 ‘신당서’에는 “고구려 사람은 공부를 좋아하고, 말먹이와 문지기까지도 공부를 하고 있어 놀랐다”는 사신의 기록이 있다. 1123년 고려를 방문한 중국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이 지은 ‘고려도경’에도 “사람들은 글을 알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왕실 도서관 임천각(臨川閣)에는 수만 권의 서책이 소장돼 있었고, 여염집 거리에도 책을 파는 서점이 두셋씩 마주보고 있었다”고 나와 있다.
1854년 러시아 문호 이반 곤차로프의 조선 탐사기록인 ‘전함 팔라다’에는 “신기하게도 가난하고도 비천한 사람들까지 시를 쓸 만큼 학식이 있었다”고 적혀 있다.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해군 소위 후보생으로 왔던 앙리 쥐베르는 ‘조선원정기’에서 “아무리 가난한 집이라도 집안에 책이 있고,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으며, 글을 읽지 못하면 주변으로부터 멸시를 받는다는 사실이 우리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고 평가했다.
쥐베르가 활약할 당시 프랑스 사람의 상당수가 문맹이고 서적은 일부 특권층을 위해 존재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표현이다. 실제 지금도 한국의 미래를 밝게 전망하는 외국 학자들을 보면 대부분 그 근거로 높은 교육열을 들고 있다.
사실 우리 역사는 교육을 빼곤 설명할 수 없다. 6000년 전 새겨진 울산 반구대 암각화(국보 285호)는 고래 잡는 법 등 생업과 관련한 각종 지식을 후대에게 교육하기 위해 바위에 새겨놓은 것이다. 훌륭한 교과서이자 우리 교육제도의 출발점인 셈이다. 기술 전수를 위한 백제의 박사제도나 신라의 국비유학제도, 고려와 조선의 과거제도 등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은 일관된 전통이었다.
교육에 대한 열정은 지금도 들끓는다. 한국 부모의 교육열은 세계에서 가장 교육열이 높다는 유대인에 버금간다. 해외서도 마찬가지다. 한인 동포들의 거주지역은 대부분 ‘학군’ 좋은 곳이다. 우리의 큰 자산인 이런 ‘교육 DNA’만 잘 보듬어도 우리의 미래는 ‘매우 밝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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