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걸크러시]〈23〉사랑 고백은 남자 몫이 아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2월 26일 03시 00분


“저는 본디 당신과 함께 부부가 되어 끝까지 남편으로 모시고 영원히 즐거움을 누리려고 했어요. 그런데 당신은 어찌 이렇게 말씀하세요. 저는 비록 여자의 몸이지만 마음이 태연한데 장부의 의기를 가지고도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다음 날 규중의 일이 알려져 친정에서 꾸지람을 듣게 되더라도 제가 혼자 책임을 질 것입니다. ―김시습의 ‘이생규장전(李生窺牆傳)’

우리 사회는 여전히 남녀 사이를 차이가 아닌 차별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성역할을 둘러싼 물리적 힘과 시스템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특정한 표현과 행동이 한 성(性)의 전유물처럼 인식되어 독점되는 경우가 많다. 얼마 전만 해도 사랑 고백과 연애의 주도적 역할은 남성이 주도했다. 남자가 사귀자 말하고 여자는 가부를 정하는 것이 정상으로 보였다.

가부장적 성격이 더 강했던 조선시대는 여성이 사랑을 고백하고 연애를 주도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부모 허락 없이 스스로 이성을 선택하고 주체적으로 사랑을 키워가는 연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이런 고정관념을 깨뜨린 여성 캐릭터가 바로 이생규장전의 주인공 최랑이다.

최랑은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외모가 아름다웠을 뿐 아니라 시와 문장에도 뛰어났다. 그는 매일 북쪽 담장을 지나 학교로 가는 이생을 눈여겨보았다. 이생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국학에 입학해 수학할 만큼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이생 역시 최랑의 아름다운 외모와 뛰어난 문장에 매료돼 있었다. 최랑의 집을 지날 때 늘 마음이 두근거렸으나 소심한 성격으로 다가가지 못했다. 최랑은 이생이 자신에게 관심이 있음을 알고는 그가 지나갈 때 큰소리로 시를 지어 읊는다. “저기 가는 저 총각은 어느 집 도련님일까?/푸른 옷깃 넓은 띠가 늘어진 버들 사이로 비쳐 오네./이 몸이 죽어 대청 위의 제비가 되면/주렴 위를 가볍게 스쳐 담장 위를 날아 넘으리.”

마음 같아서는 새처럼 담장을 넘어 그를 만나고 싶다는 참으로 과감한 고백이었다. 이생은 그 의미를 단번에 알아차리고는 저녁에 만나자는 내용의 시를 지어 집으로 던진다.

“님이여, 의심하지 마세요. 황혼에 만나기로 해요.” 최랑은 곧장 메시지를 보내고 이생이 담장을 넘을 수 있게 그넷줄에 대바구니를 달아 담장 아래에 준비해 둔다. 해가 지자 이생은 최랑이 준비한 도구들을 이용해 담장을 넘는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행동이 들킬까 머리털이 곤두설 정도로 긴장했다. 이 모습을 본 최랑은 당돌했다. 첫 만남에서 이생에게 청혼하고 이후 발생하는 문제는 자기가 책임지기로 한다.

두 사람은 집안의 반대로 이별을 맞지만 사랑에 대한 최랑의 집념으로 이를 극복하고 결국 결혼한다. 이후 홍건적의 침입으로 최랑이 죽지만, 천제(天帝) 역시 이들의 사랑을 안타깝게 여겨 환생시켜 준다. 이생은 다시 나타난 최랑이 귀신임을 알지만, 못다 한 사랑을 나눈 후 저승으로 돌려보낸다.

우리는 이 이야기 속에서 스스로 반려자를 선택하고, 주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사랑을 이어갔던 아름답고 매력적인 15세기 여성상을 만날 수 있다. 이런 최랑의 모습은 가부장제에 포섭당하지 않았던 여성다움의 실체가 아니었을까?
 
강문종 제주대 교수
#김시습#이생규장전#최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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