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은 지난해 “강제징용 피해자의 일본 기업에 대한 위자료청구권(징용청구권)은 청구권 협정의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으므로 소멸하지 않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에 대한 일본의 입장은 징용청구권이 협정에 포함돼 소멸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최고 사법기관의 판단을 존중하고 결론에 동의한다. 다만 일본이 왜 계속 위와 같이 주장하는지 한 번쯤 귀 기울여 보고, 대응 논리를 마련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제2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에 있어서 관련 국가들의 합의를 통해 일정한 급부 수수(收受) 등을 조건으로 각 국민의 상대방 국가, 국민에 대한 청구권도 모두 소멸시키는 것이 국제사회에서 허용되고 있는 방식(일괄타결 협정)이다. 그런데 청구권 협정(제2조 제1항)은 ‘양 체약국은… 그 국민(법인을 포함)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그 국민 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고 명시하고 있으므로, 문구만 보면 일본의 주장처럼 법인을 포함한 양 국민 상호 간의 청구권도 모두 소멸시키기로 합의한 일괄타결 협정으로 볼 여지는 있다.
하지만 위와 같은 일본의 해석에 의하더라도 직관적인 의문이 생긴다. 일괄타결 협정이 국제사회에서 허용된다 해도 국가들 마음대로 어떠한 청구권이든 모두 소멸시킬 수 있는가?
이에 대한 해답을 주는 것이 ‘국제적 강행규범’과 ‘개인의 국제법 주체성’이라는 현 국제법의 두 가지 흐름이다. 국제적 강행규범은 국제법상 최상위 규범이자 국제재판소에서도 채택하고 있는 실정법적 개념이다. 노예제, 고문 금지 등이 예다. 핵심은 ‘모든 나라를 구속하므로 어떤 나라도 그 위반을 묵인할 수 없고, 그에 위반한 어떠한 국가 간의 합의도 무효’라는 것이다.
아울러 법인을 포함한 개인이 국제법의 주체로서 권리, 의무를 갖는다는 것 또한 국제법의 중요한 흐름이다. 유엔은 2005년 ‘피해자 구제권리 기본원칙 및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개인의 국제법 주체성을 명시했다. 개인이 국제적 강행규범 위반을 이유로 국가와 개인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위와 같은 국제적 강행규범과 개인의 국제법 주체성 개념을 일괄타결 협정에 접목시켜 보자. 일괄타결 협정으로 개인적 청구권까지 소멸시키도록 합의하는 것이 허용된다 하더라도 ‘국제적 강행규범 위반에 의한 청구권’만큼은 소멸 합의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개인의 국제법 주체성을 부정하는 것인 데다 국제적 강행규범 위반의 묵인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징용청구권은 당시 피해자들의 증언 등을 종합할 때 국제적 강행규범 중 노예제 금지 위반 등에 의한 청구권의 성질을 갖는다. 징용 과정에서의 강제성에 관해 일본이 의문을 제기할 수는 있으나, 우리 피해자들이 징용 현장에서 당한 대우가 ‘노예 그 자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결론적으로 설령 청구권 협정을 일본 주장처럼 일괄타결 방식으로 보더라도 징용청구권에 관한 양국의 소멸 합의는 여전히 무효로 볼 수밖에 없다. 즉, 징용청구권과 같이 개인의 국제적 강행규범 위반에 따른 청구권만큼은 국가가 함부로 손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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