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 1일, 기미독립선언은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했다. 그날로부터 2개월 넘게 한국민이 사는 곳이면 국내외 어느 곳에서나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일본 측 통계에 따르더라도, 전 국민의 10분의 1인 약 200만 명이 거리로 나왔다. 이들은 맨손으로 일제에 저항했다.
이날의 선언은 “인류적 양심의 발로에 기인한 세계개조의 대기운에 순응병진”하기 위함임을 밝혔다. 이 때문인가. 같은 해 아일랜드에서 독립선언이 있었고, 중국 베이징에서 5·4운동이 일어났다. “위력의 시대가 거(去)하고 도의의 시대가 래(來)”했음이 현실로 다가왔다. 약육강식의 제국주의가 끝나고 민족자결주의가 지배적 원리가 되었다. 한국의 독립운동은 많은 피압박 민족 해방운동과 따로 있지 않았고, 오히려 세계사의 흐름을 이끄는 것이었다.
이런 독립선언의 정신을 구현하려면 우선 정부가 있어야 한다는 게 당시 선열들의 일치된 생각이었다. 마치 사전 시나리오라도 있었던 것처럼 각지에서 임시정부 수립 작업이 진행됐다. 총독부 감시하의 한성에서, 많은 망명객들이 모여 살던 중국 상하이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등에서…. 그 가운데 상하이에서 출범한 임시정부가 가장 많은 인사들의 참여 아래 4월 10일 임시의정원을 소집했고, 다음 날 4월 11일까지 열띤 토론을 거쳐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결정했다. 그리고 헌장 10개조를 채택했다. 제1조의 민주공화제를 비롯해 민주주의 권리와 의무가 모두 확립된, 아주 훌륭한 기본법이었다. 특히 제10조 ‘국토 회복 후 1년 내에 국회를 소집한다’는 조항은 1948년 제헌국회 구성을 사전 예비한 것으로 주목할 만하다.
이런 점에서 현재의 헌법 전문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적시한 것은 지극히 타당한 것이다. 세계 독립운동사에서 원래 있던 정부가 외침에 의해 타국으로 옮겨가 세운 ‘망명정부’는 여럿 있었지만, 해외로 망명한 인사들이 국내의 열렬한 지지와 호응 속에 새 나라와 그 나라의 ‘임시정부’를 세우고 이를 독립운동의 주체로 삼은 사례는 일찍이 없었다.
이 임시정부는 장장 26년 동안 일제의 간악하고 집요한 공격에 쫓기면서도 대일항쟁을 계속했다. 때로는 사상적으로 갈리고 독립운동 방략의 차이로 내분도 겪었지만 그런 절망의 순간에도 불굴의 의지로 정부의 권위와 중심적 지위를 잃지 않았다.
3·1독립선언의 정신이 한국의 독립에 그치지 않고,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반대하고 세계 평화와 인류의 공존공영을 외쳤던 그 정신 그대로 우리 임시정부는 외교 교섭도 했고, 군사 양성도 했다. 그리고 끝내 연합국의 일원으로 대일 선전포고를 했던 것이다.
이제 3·1독립선언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100주년을 맞아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관을 건립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제 우리 손으로 민족의 통합과 세계 평화를 한반도에서 이룩하자는 것이다. 올해의 임시정부 수립기념일 4월 11일은 이런 큰 뜻을 담고 있다.
이런 뜻이 통했는지 이날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해 기리는 데에 전 국민의 3분의 2 이상이 찬성했다. 국민의 뜻이, 더 이상 머뭇거리지 말고 100년 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신대로 통합과 평화의 기조 아래 새로운 100년을 만들어 가자는 방향으로 모아진 것이라 믿는다. 오직 한 번뿐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을 삼가 옷깃을 여미고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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