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이 불면 배는 늘 뒤쪽에서 바람을 받으며 항해해야 한다. 1980년대 후반 미국에서 한국으로 항해할 때의 일이다. 북태평양 인근에서 시계 방향으로 거센 태풍이 불었다. 우리 배도 태풍을 뒤에서 받으며 뱃머리를 한국 방향에서 북쪽으로, 미국 쪽으로, 다시 한국 쪽으로 돌려가며 항해해야 했다. 태풍이 불면 동시에 긴 파도가 치는데, 파도와 파도 사이의 간격이 200m쯤 된다. 그사이에 뱃머리를 180도 돌려 배의 자세를 바꿔야 하는데 덩치 큰 배의 자세를 바꾸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나는 초시계를 가지고 파도의 주기를 살폈다. 주기가 상당히 길어졌고 파고도 많이 낮아졌다. 선장에게 “이제 배를 다시 돌려도 되겠다”라고 보고했다. 선교에 올라온 선장은 바다를 살피더니 “3등 항해사 괜찮겠나. 그러면 한번 돌려봐”라고 허락했다. 큰 파도가 지나간 즉시 “조타기 왼쪽으로 완전히 돌려”라고 조타수에게 명령했다. 숨을 죽이고 뱃머리가 돌아가는 것을 지켜봤다. 생각보다 느리다. 멀리 왼쪽에서 다시 큰 파도가 밀려오고 있다. 선장은 다급히 “조타기 다시 오른쪽으로”라고 명령을 내렸다. 큰 파도를 맞아 배가 전복될 뻔한 것이다. 선장은 “아직 파도 읽는 것이 서투른데 경험이 더 쌓이면 나아질 것”이라고 충고했다.
2등 항해사로서 미국 북서부에서 중국으로 원목을 수송할 때였다. 원목을 내려주면 원목 껍질이 화물선창에 산처럼 쌓인다. 삽 한 자루로 이를 치워야 했는데 모든 선원이 투입됐다. 일본에서 철재를 실으려면 선창을 깨끗하게 해둬야 한다. 일본 입항까지는 여유가 이틀밖에 없다. 밤을 새워가며 껍질을 치우고 다시 항해당직을 올라가게 됐다. 손이 부족해 당직 타수도 일을 하러 보냈다. 선교에서 선장과 내가 원목 껍질 치우는 일을 지켜보고 있었다. 선창 안에 있는 껍질을 담은 포대를 크레인으로 걸어서 갑판 위로 올린다. 껍질은 버리고 포대는 회수해야 하므로 포대를 뱃전에 걸어두어야 했다. 갑판수가 이 일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는 선박의 오른쪽 난간 위에 올라가 있었다. 난간 아래에 있어야 안전한데. 앗! 순간 배의 움직임에 그는 균형을 잃고 바다로 떨어졌다. 놀란 선장이 “배를 오른쪽으로 돌려라”라고 명령했다. 불행히도 오른쪽에 상선 한 척이 내려오고 있었다. 나는 “오른쪽으로 돌리면 상선과 충돌한다”고 보고하고 배를 바로 돌리지 못하였다. 상선이 지나간 다음 배를 돌렸지만 갑판수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선장의 경륜을 믿고 바로 배를 돌렸으면 그를 구할 수 있었을까.
1등 항해사로서 세 번째 담당한 선박은 선장이 되기 직전의 배였다. 그때 선장이 나를 불렀다. “선장이 되면 항상 1, 2, 3 순서로 문제 해결 방안을 머릿속에 준비해야 한다.” 배는 좁은 공간을 벗어나면 바로 위험천만의 바다로 나간다.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니 첫 번째 방안이 통하지 않으면 두 번째, 세 번째 방안을 준비해 두고 활용하라는 것이다. 이런 자세는 바다의 선장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육지의 책임자들에게도 필요한 것이리라. 예측불허의 거친 바다에선 플랜B를 넘어 플랜C까지 준비해야 한다. 바다를 항해하면서 체득한 선배 선장들의 경륜과 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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