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버의 한국 블로그]응답하라, 카세트테이프 팔던 서울 거리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3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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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카버 영국 출신 서울시 글로벌센터팀장
폴 카버 영국 출신 서울시 글로벌센터팀장
서울에 거주하는 외국인 인구가 최근 몇 년간 40만 명과 45만 명 사이를 오락가락하고 있다. 구성원들을 분석해보니 2월은 변동이 가장 빈번한 시기다. 새 학년의 시작을 앞두고 신참 영어강사들이 한국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많이 입국한다. 신입 유학생들이 학문적인 목표를 갖고 한국을 찾기도 한다.

새로 온 외국인들이 서울 생활에 빨리 적응할 수 있도록 서울글로벌센터에서는 ‘서울 생활 오리엔테이션’을 한다. 최근 2주간 나를 포함한 우리 센터 직원들이 17회에 걸쳐 12개 대학교 2300여 명의 학생들에게 서울글로벌센터 지원 사업을 설명하고 각종 유용한 정보를 전해주었다. 요새 웬만한 정보는 인터넷 검색으로 파악할 수 있겠지만 전문가로부터 최근 업데이트된 정보를 듣는 것 또한 큰 힘이 될 것이다.

젊은 학생들의 호기심 가득한 얼굴을 보며 문득 한국에 처음 왔던 시기를 떠올려 보았다. 1990년대 후반의 어느 여름, 문화체험 프로그램에 참석하기 위해 김포공항에 입국했고 우여곡절 끝에 한국외국어대까지 혼자 찾아갔다. 중국에서의 1년 유학 생활을 마치고 왔기에 해외 경험에 대해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한국 생활 초반은 마치 물 밖으로 처음 나온 물고기 같았다.

당시는 서울글로벌센터가 미처 생기기도 전이라 오리엔테이션이 딱히 없었고 캠퍼스투어도 이미 끝난 시기였다. 그냥 알아서 할 수밖에 없었다. 배정된 숙소는 한국외국어대 앞의 한 가정집(홈스테이)이었다. 할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던 가족 중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은 없었다. 나도 한국말을 하나도 몰랐기에 애를 많이 먹었다. 방에 갇혀 있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자주 얼굴을 비쳤고, 최대한 미소를 많이 지었다. 간단한 수화로 의사소통을 하는 바람에 오해도 꽤 많았다. 그래도 내게 잘해준 가족 덕분에 많이 배우게 됐다.

얼마 전 거의 20년 만에 다시 그 동네를 찾았는데 많이 변해 있었다. 홈스테이를 했던 가족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 그 집도 갔는데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던가. 두 번의 강산이 변하는 시간이었던 만큼 그 동네의 단독주택들은 모두 재개발돼 있었다.

당시 기억이 많이 사라지기는 했지만 휴대전화가 대중화되기 전이라 모두가 ‘삐삐’(무선호출기)를 갖고 다녔던 생각이 난다. 그해 여름은 한국어 공부뿐만 아니라 삐삐에 사용되는 숫자암호까지 배워야 했다. 영국의 보통 사람들은 삐삐를 거의 안 썼던 때라 익숙하지 않았지만 한국에서는 필수품이어서 배워야만 했다. 커피숍에는 마치 콜센터처럼 식탁마다 전화기가 한 대씩 있었다. 올해 한국에 처음 온 학생들은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얘기해도 믿지 못할 장면이다.

또 생각나는 건 길가에서 음악 카세트테이프들을 팔았다는 사실이다. 지난번 영국에 갔을 때 어머니 부탁으로 창고에 있는 짐들을 정리하다 당시 샀던 카세트테이프 몇 개를 발견했다. 노래 목록들을 보며 향수에 가득 잠겼다. 박스 안에는 그해 만났던 첫 한국 여자 친구의 사진과 편지도 있었다. 문화 차이로 헤어졌지만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영국에 귀화했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아직 한국에 있다. 세상에는 아이러니가 참 많다.

학기가 끝날 무렵, 나의 첫 한국어 선생님은 내게 ‘의욕은 많아 보이는데 한국에서 취직하기에는 실력이 부족하다’고 평가했다. 그 말을 듣고 한국어 수업은 그만두었지만 한국에서 사는 꿈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지금도 한국에서 잘살고 있다.

강의 때 외국인 학생들이 자주 하는 질문 중 하나는 ‘한국에서 오래 살면서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다. 내 대답은 항상 ‘열린 마인드의 사람 되기’다. 20년 동안 한국에 살면서 때때로 정체기가 오기도 했고, 냉소적으로 이곳에서의 삶을 되돌아보기도 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한국은 지속적으로 조금씩 진화하고 있고 정체기가 올 때쯤 내게 새로운 것들로 영감을 주고 동기부여를 하게 만들었다.

최근 만났던 학생들도 어떤 계기로 한국에 오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체류 기간에 분명 좋은 경험을 많이 할 것이라고 믿는다. 교환학생으로 한 학기만 왔든, 아니면 몇 년 동안 학사과정으로 왔든 상관없이 한국에 온 걸 환영하고 여기 있는 동안 좋은 일들만 가득하길 기원한다.
 
폴 카버 영국 출신 서울시 글로벌센터팀장
#외국인 인구#서울글로벌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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