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딜로 끝난 하노이 회담에서도 몇 가지 성과는 있었다. 그중 하나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서방 언론에 데뷔한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단독 회담에서 김정은이 “협상을 타결할 자신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고 “속단하긴 이르다고 생각한다. 예단하진 않겠다”고 ‘깜짝 답변’한 게 시작이었다. 확대 회담에선 “비핵화가 준비됐느냐”는 질문에 “그런 의지가 없다면 여기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답했다. 노동신문, 조선중앙TV를 통해 하고 싶은 말을 전하던 것과 달리, 기자와의 즉석 일문일답을 통해 육성과 표정이 날것 그대로 전달됐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트럼프-김정은 정상회담에서 어떻게 이런 장면이 가능했을까. 그건 기자들이 앞뒤 재지 않고 그냥 물었기 때문이다. 김정은에게 질문한 워싱턴포스트, 로이터통신 기자들은 백악관 출입기자들이다. 백악관 기자단은 대통령의 모든 공개 일정에 ‘풀 취재’(돌아가면서 대표 취재해 내용을 공유하는 시스템) 기자들을 보낸다. 이들은 대통령을 포함해 대상을 가리지 않고 가장 궁금한 것을 기습적으로 묻는 게 의무처럼 되어 있다. 트럼프가 주말에 골프 치러 갈 때도 골프장 앞 햄버거 가게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질문할 기회를 노린다.
이런 노력이 계속되는 건 가끔 질문에 답을 하기 때문이다. 트럼프가 7일 북한의 동창리 미사일 발사장 복구 움직임에 대해 “(김정은에게) 실망스럽다”고 한 것도 체코 총리와의 회담 직전에 기자들이 쏟아낸 질문에 답한 것이다. 지난해 5월 트럼프가 문재인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도중 “북-미 정상회담이 안 열릴 수도 있다”며 전 세계를 뒤집어 놓은 것도 한 기자가 고함치듯 물어본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청와대에도 이런 시스템은 있다. 대통령 주재 각종 회의는 물론 정상회담에도 풀 기자가 들어간다. 그러나 질문과 대답은 거의 오가지 않는다. 주로 회의 모두발언을 기록한 뒤 회의장에서 빠진다. 이명박, 박근혜 청와대 때도 마찬가지였다. 기자도 이전에 청와대를 출입하면서 각종 회의를 풀 취재했으나 질문해 본 적은 없다. 딱히 질문이 금지된 건 아닌데 관행이 그렇다. 평소 대변인과 공격적인 질의응답을 주고받는 청와대 기자들인데도 말이다. 여러 요인이 겹쳤을 것이다. 경호 문제도 있고, 대통령 일정 도중에 이런 질문을 ‘돌발 행동’으로 여기는 권위주의적 분위기도 아직 남아있다. 대통령을 ‘나라님’으로 여기는 유교 문화의 자장(磁場)에서 벗어나지 못한 측면도 있을 것이다.
문 대통령은 언론을 통해 현안에 대한 생각을 자주 밝히는 스타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질문을 마냥 피해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묻는 쪽이나 답해야 하는 쪽 모두 경험이 없을 뿐이다. 김정은과 트럼프의 경우에서 보듯, 팩트를 향해 날것 그대로 던진 질문과 즉석에서 나오는 생생한 답변은 종종 예상을 뛰어넘어 사람들의 알 권리를 충족시킨다. 마침 문 대통령이 10일부터 동남아 3개국 순방에 나섰다. 80여 명의 기자도 동행하고 있다. 국민들은 대통령의 육성을 통해 듣고 싶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북-미 비핵화 중재를 어떻게 할 것인지, 미국의 반대에도 금강산 관광을 재개할 것인지, 올해도 소득주도성장 계속할 건지…. 간담회라도 한다면 정해진 영역의 질문만 받지 말고 격식을 깨고 시원하게 답했으면 좋겠다. 기자들도 “얼마나 고생이 많으십니까”류의 인사는 나중에 하고 송곳처럼 파고들어야 한다. 본보가 우리 속의 관행과 구습을 되돌아보기 위해 화제 속에 연재하고 있는 신예기(新禮記)는 제사나 명절에만 필요한 게 아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