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벽에 기대선 채로/해가 스무 번 바뀌었는데/내 기린은 영영 울지를 못한다.” 영랑 김윤식의 암울하고 처연한 시 ‘거문고’는 이렇게 시작된다. 기린은 거문고의 고고한 음색과 자태를 가리키는 은유다. 그 기린이 20년 전에 울고 더 이상 울지를 못하고 있다니 무슨 일일까. 이 시가 발표된 것이 1939년이었으니, 그때로부터 20년 전이라면 1919년이다.
3·1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영랑은 서울에 있는 휘문의숙(현재의 휘문고)에 다니고 있었다. 독립운동의 여파로 학교가 문을 닫자, 그는 고향인 강진에 내려가 학생운동을 도모하다 잡혀 몇 개월을 대구형무소에 갇혔다. 그런데 20년이 지났건만 현실은 더 암울해졌다. “바깥은 거친 들 이리떼만 몰려다니고/사람인 양 꾸민 잔나비떼들 쏘다니어/내 기린은 맘 둘 곳 몸 둘 곳 없어지다.” 이리떼와 원숭이떼로 비유되는 일본인들과 친일파들이 활개를 치는 세상에서 거문고, 즉 예술이나 민족의 자유가 설 자리는 없었다.
씨알 아니 신천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인용하자면 ‘이 나라의 지사, 사상가, 종교가, 교육자, 지식인, 문인은 신사 참배하라면 허리가 부러지게 하고, 성을 고치라면 서로 다투어가며’ 했다. 영랑은 그런 것들을 거부하고 ‘독(毒)을 차고’라는 시가 말해주듯 독한 마음으로 살았다. 그리고 절필을 택했다. 그는 1940년의 ‘춘향’을 마지막으로 광복이 될 때까지 단 한 편의 시도 발표하지 않았다.
1946년 동아일보에 발표한 ‘치제’는 절필 후의 첫 시였다. ‘자네 소리하게 내 북을 치제(잡지)’로 시작하는 치제에서 시인은 고수를 자청하여 북을 치며 소리꾼과 더불어 ‘가을같이 익어가’는 삶의 찬가를 벅차게 노래했다. 기린, 아니 거문고도 마음 놓고 울기 시작했다. 나라를 찾으면서 거문고도 찾고 북도 찾고 희망도 찾은 것이었다. 그 영랑이 지난해 독립유공자로 건국포장을 받았다. 늦었지만 당연한 일이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