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임희윤]밀실살인,공범의 사회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3월 18일 03시 00분


임희윤 문화부 기자
임희윤 문화부 기자
“조선사람, 냄새난다!” “조선놈, 돌아가라!”

얼마 전 서울에서 만난 재일교포 가수 박보 씨(64)는 또래 친구들의 이런 말을 자연스레 듣고 자랐다고 했다. 일본 시즈오카현에서 보낸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는 애써 껄껄 웃었지만 그때의 야유가 환청처럼 귓가에 선한 듯했다.

박 씨의 아버지는 한국인이다. 일제강점기에 대한해협을 건넜다. 일본인 어머니를 만나 박 씨를 낳았다. 그러나 일본 호적상 박 씨는 이른바 ‘편모’ 슬하였다. 한국인과의 결혼을 인정하지 않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성도 처음에는 어머니의 일본 성을 따랐다.

박 씨는 데뷔 당시 촉망받는 가수였다. 걸출한 기타 연주와 노래 실력을 갖췄지만 데뷔 이듬해 아버지의 성을 딴 한국 이름으로 개명했다. 성공에 대한 희망을 내려놨다. 그 대신 평화운동가 겸 가수가 됐다. 노래에 한국어와 일본어 가사를 함께 쓰고, 때로 과거사에 대한 반성이 없는 일본에 뼈아픈 비판 메시지를 날리기도 했다.

그 이야기를 전한 며칠 뒤, 박 씨는 오랜만에 어린 시절처럼 야유를 들었다. 서울시내에서 열린 3·1운동 100주년 기념행사 무대에 올라서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양국 정부에 호소하려 ‘봉선화’를 한국어와 일본어로 부른 것이 화근이었다. 일부 행사 참석자가 “3·1절에 일본어가 웬 말이냐”고 항의를 하는 통에 공연이 잠시 중단된 것이다.

“×××, 물러가라!”

혐오의 야유는 오래전 흘러간 이야기가 아니다. 되레 강해졌다. 형체가 없는 온라인상에서 더 힘을 받는다. 인터넷 창을 열면 특정 인종, 특정 종교의 신자, 난민을 향한 입에 담기 힘든 수준의 혐오 발언을 쉽게 접할 수 있다. 남녀노소 누구나 볼 수 있는 뉴스 댓글 창에서 말이다.

가수 승리와 정준영의 단톡방에서는 여성이 대상이었다. 가증스러운 범죄 행위는 단체 대화 속에서 어느새 흥미로운 게임 또는 장난스러운 무용담으로 변질했다. 혐오는 나누면 나눌수록 눈덩이 불어나듯 커졌고, 죄의식은 반비례해 제로로 수렴한 셈이다.

15일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일어난 이슬람사원 무차별 총격 사건은 또 어떤가. 용의자인 브랜턴 태런트는 추악한 살상 과정을 페이스북으로 생중계했다. 살상무기에 인종 혐오 테러리스트나 사건의 이름을 새겨뒀다.

이들은 어느 날 마른하늘에서 뚝 떨어진 악마가 아니다. 수천수만의 잠재적 공범, 혐오의 말과 죄의식을 나눈 얼굴 모를 형제들이 만들어낸 어긋난 인격의 집합체이자 현현이다. 기괴한 돌연변이 유전자를 지닌 개인의 소행이 결코 아니다. 각자의 방에서 공조한 익명의 공범 행위는 밀실살인처럼 교묘하다.

이번 테러에 대해 사디크 칸 영국 런던 시장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모두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말, 확산시키는 메시지까지 아주 신중해야 합니다.”

임희윤 문화부 기자 imi@donga.com
#일제강점기#승리#정준영#이슬람사원 총격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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