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학자가 주문한 포퓰리즘의 길… 이념투쟁보다 실천에 주력해야
낮은 인권 감수성, 미세먼지에 무능… 성찰 없는 진보정권의 덫 넘으려면
‘과거호출’ 대신 ‘지금여기’ 집중할 때
지금 유럽에서는 ‘좌파’라는 표현을 부정적 어감으로 받아들인다고 한다. ‘좌파’란 말에 대한 거부감은 곳곳에서 극우 정당이 득세하는 현실에서 잘 드러난다. 이에 대해 반성하는 목소리가 진영 내부에서 나온다. 자신들 생각과 전적으로 일치하지 않으면 백안시하는 정치 풍토에 대한 자가점검이다. 오랜 사회민주주의 전통의 유럽답다.
예를 들면 프랑스의 좌파는 그동안 이렇게 말해왔다. “(극우파 정치인) 마린 르펜에게 투표한 사람과는 말조차 섞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파시스트이고, 개선될 가망도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옹졸한 대응 방식이, 급진적 민주주의를 주창하는 좌파 정치철학자 샹탈 무프 같은 사람에게는 못마땅하다. 무프에 따르면 르펜 지지층 중 상당수는 과거 공산당에 투표한 이들과 겹친다. 그 ‘변심’의 계기는 무엇인가. “여러분의 걱정을 충분히 이해한다”고 말해준 후보가 오직 르펜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무프가 지난해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를 출간했을 때 인터뷰에서 진단한 좌파의 현주소다. 의견이 다르다 싶으면 극우로 치부해 버리고, 대중의 절실한 요구에 둔감하며, 지지층 아닌 이들은 ‘수준 탓’을 하며 배척하는 좌파의 타성은 세계 공통인 모양이다. 최근 국내서 출간된 이 책은 포퓰리즘의 의미를 재구성한 저서다. 우파 포퓰리즘에 밀려나는 유럽 좌파의 앞날을 고민하는 흔적이 역력하다. 그가 보기에 좌든 우든 그 행태만 보면 도긴개긴, 경계가 흐릿한 지경이다. 리더를 향한 맹종, 언론에 대한 의구심, 길거리 정치, 정의에 대한 감정적 접근 등 닮은꼴이다. 좌파는 스스로 만든 덫에도 갇혀 있다. 시대 변화 속에 계급만으로 설명이 힘든 문제들, 페미니즘 반인종주의 생태환경문제 등이 대두했음에도 여전히 노동계급 관점에 고착된 정치적 전선에 얽매여 있다는 얘기다. 유럽 상황을 토대로 했으나 우리도 참고할 대목이 있어 보인다.
진보정권 시대인데 되레 좌파의 이상과 엇나가는 일이 다반사로 벌어진다. 인류 보편의 가치인 인권에 대한 경시, 민주주의 기본 전제인 언론의 자유에 대한 낮은 감수성이 대표적이다. 북한 비판 탈북단체에 대한 압박은 인권 침해라는 지적이 미국의 ‘2018 국가별 인권보고서’에 실렸다. 선량한 시민이 금강산에서 생명을 빼앗긴 사건을 ‘통과의례’라 발언한 분이 통일부 장관 후보자로 지목됐다. 이 와중에 현 정권을 북한 대변인에 빗댄 6개월 전 외신을 야당 대표가 인용함을 계기로 해당 기자 개인을 집중 공격하고 나섰다. “미국 국적 통신사의 외피를 쓰고 국가 원수를 모욕한 매국에 가까운 내용’이라 절규한 집권당 성명은 하도 원색적이라 어리둥절할 지경이다.
북한과 언론은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이라서 그렇다 치자. 전 국민이 이해당사자인 미세먼지 문제는 어떤가. 지긋지긋함을 넘어 공포의 대상이 된 이 독극물로 인해 21세기 한국에서 난데없이 일제 치하의 저항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다시 외쳐야 할 판국이다. 미세먼지에 관한 대선공약은 어디로 갔는지 알 길 없고, 하나 마나 한 말과 대책만 무한반복 이어진다.
모든 해법의 첫 단추는 낡은 사고에서 탈피해 정치적 운신의 폭을 넓히는 데서 시작된다. 앞서 말한 무프는 현 국면이 이념 논쟁에서 벗어나 실천을 향해 나아가야 할 때라면서 이렇게 강조했다. “좌파 포퓰리즘 전략은 입헌적 자유민주주의 틀 안에 새로운 헤게모니 질서를 구축하려 함이지, 다원적 자유민주주의와의 급진적 단절, 그리고 완전히 새로운 정치질서의 구축을 목표로 하는 것은 아니다.”
현실의 막중한 과제 앞에 고개 돌린 채 과거를 지속적으로 호출하는 정치 행태로 인해, 어느덧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판타지 영화 같은 현실을 맞이한 대한민국. 어제의 어떤 문제도, 지금 이 순간 우리 앞에 닥친 현실보다 중요할 수는 없을 터다. 누구 못지않게 진보를 아끼는 원로학자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대통령의 3·1절 100주년 기념사에 대해 점잖지만 따끔하게 지적했다. “과거에 대한 청산 작업은 개혁자의 정치적 목적에 상응하는 방식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어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할 수 없다”고.
특정 정책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무조건 정권의 실패를 바라는 것으로 혼동하면 안 된다. 득이 되는 포퓰리즘과 독이 되는 포퓰리즘, 어느 쪽을 향해 갈 것인가. 분단을 극복하자며 남한을 양분 상태로 몰아가는 정권과 사회라면 그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어떤 방법으로도 과거를 바꿀 수는 없지만 미래는 다른 문제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