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섭의 패션 談談]〈17〉빼앗긴 봄에도 꽃무늬를 둘러요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3월 23일 03시 00분


간호섭 패션디자이너·홍익대 미술대 교수
간호섭 패션디자이너·홍익대 미술대 교수
봄이 진짜 오는가 싶습니다. 낮밤의 길이가 같다는 춘분이 돼서 해는 길어진 것 같은데. 미세먼지가 하늘을 가려서인지 봄을 빼앗긴 것 같네요. 그래도 지나다 보면 여기저기 꽃망울이 맺혀 있습니다. ‘꽃 피는 봄이 오면’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진달래 피네’ 등 귀에 익은 가사처럼 봄은 꽃과 함께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패션도 봄을 준비하며 꽃을 빼놓을 수는 없죠. 다양한 꽃무늬 패션이 봄을 알리고 있습니다. 꽃무늬는 인류 역사상 가장 원초적이고 오래된 무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름다운 색을 머금고 향기를 뿜어내는 꽃을 늘 몸에 치장하고 싶은 욕망이 꽃무늬를 만들어냈습니다. 시들지도 않고 물을 줄 필요도 없지요. 사람의 개성에 따라 선택하는 꽃무늬도 다양합니다. 도도하고 섹시한 여성을 흑장미, 수줍고 말없는 여성을 한 송이 백합화에 비유하듯 꽃무늬에는 상징이 존재합니다. 나라를 상징하는 국화(國花)가 자국에서 가장 널리 자생하고 국민 정서를 반영하듯 꽃무늬도 지역의 종교, 관습, 문화에 영향을 받습니다.

영국의 국화인 장미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꽃이지만 피비린내 나는 애증의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 15세기 영국의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이 벌였던 왕위 계승전쟁을 장미전쟁이라고 합니다. 랭커스터 가문의 문장은 붉은 장미였고 요크 가문의 문장은 흰 장미였습니다. 30년간 이어진 이 전쟁은 랭커스터 가문의 헨리 7세의 승리로 끝났지만 그가 요크 가문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함으로써 완벽한 종지부를 찍게 됩니다. 이로써 붉은 장미 속에 흰 장미가 피어나는 모습의 새 문장이 탄생하는데 이를 튜더 로즈라 하고 아직까지도 영국 왕실의 문장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동양에서는 모란이 풍요와 번영의 상징이었습니다. 둥그스름한 모양이 복주머니를 닮기도 했고 겹겹이 포개진 꽃잎이 탐스럽습니다. 화려하면서도 품위가 있어 예부터 왕실 여인들의 방에 병풍 그림으로 그려졌지요. 그래서 부귀화(富貴花)라고 하기도 하고 ‘꽃 중의 으뜸’ 화중왕(花中王)이라고 합니다. 한국에서는 가장 중요한 예복 중 하나인 활옷에 자수로 놓았습니다. 활옷은 조선 중·후기 공주와 옹주의 대례복, 임진왜란 이후부터는 왕녀들이 입던 예복으로 후에는 일반 서민도 혼례식에서 입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꽃무늬가 역사적인 배경과 심오한 상징을 담고 있지만은 않습니다. 여름철 누구나 즐기는 하와이안셔츠는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습니다. 시원한 리넨이나 코튼 소재에 하와이 토종꽃 무늬들을 대담하게 프린트하고 나무나 코코넛으로 만든 단추를 달아 클래식한 패션 아이템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 셔츠는 1930년대 하와이에 이민 온 일본인 미야모토 고이치로 씨가 쓰고 남은 꽃무늬 기모노 천을 조각보식으로 봉제한 셔츠에서 유래했습니다. 당대 최고의 슈퍼스타였던 엘비스 프레슬리도 영화 ‘블루 하와이’에서 하와이안셔츠를 입고 등장했습니다.

이제 곧 주변의 거리, 산과 들에도 꽃무늬가 가득해질 겁니다. 그리고 움직이는 꽃무늬도 더 많이 눈에 띌 듯합니다. 빼앗긴 봄을 안타까워하기보다는 꽃무늬 스카프라도 둘러보면 어떨까요. 저도 오늘은 옷장에서 꽃무늬 셔츠를 꺼냈습니다.
 
간호섭 패션디자이너·홍익대 미술대 교수
#봄#꽃무늬 패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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