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말, 특히 그가 날리는 트윗에선 그의 기분이나 심사를 읽어야지, 너무 꼼꼼히 따지다간 수렁에 빠지기 일쑤다. 디테일 부족은 물론이고 사실 여부마저 문제가 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트럼프는 지난주 ‘추가 대북제재를 철회하도록 지시했다’는 트윗을 올렸는데, 그 제재가 뭔지를 놓고도 아직껏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트럼프가 그런 트윗을 날릴 때마다 죽어나는 것은 아랫사람들이다. 백악관 참모들은 이번 트윗에 대해 전날 발표한 중국 해운사 2곳의 제재를 번복하는 게 아니라 조만간 나올 새로운 제재 계획을 취소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외신들은 다른 제재 계획이라곤 없었고 거짓으로 둘러댄 것이라고 전한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마저 의회 청문회에서 자기 소관이 아니라 모른다는 취지로 얼버무려야 했다.
행정부의 정책결정 절차를 뒤집어 혼란에 빠뜨리는 ‘미친 동네(crazy town)’의 수장 트럼프 밑에서 군인, 경영인 출신 참모들이 하나같이 버티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폼페이오의 건재함은 두드러진다. 대통령과 좀처럼 충돌하지 않는 폼페이오의 처신은 군인, 사업가, 하원의원을 거친 야심가인 데다 고통스러운 학습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 에피소드 하나. 트럼프는 재작년 대통령 취임 이튿날 중앙정보국(CIA)을 방문해 직원들을 향해 시종 자기 자랑과 허세 가득한 횡설수설을 늘어놓았다. 급기야 새 국장 지명자 폼페이오를 끌어들였다. “나는 올해 주간 타임 표지에 열다섯 번 나왔어요. 난 그게 깨질 기록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마이크, 어떻게 생각해요.” 폼페이오는 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죠.”
어쨌든 트럼프는 이번 제재 철회 트윗으로 김정은에게 ‘대북정책은 누가 뭐래도 내가 결정한다’는 메시지를 명확히 전달했다. 혹시라도 모자랄까 봐 대변인을 통해 “대통령은 김정은을 좋아한다”는 말까지 하도록 했다. 북한이 트럼프 참모들을 싸잡아 비난하면서도 “두 정상 간 케미스트리는 신비할 정도”라고 밝힌 대목에 화답이라도 하는 모양새였다.
과연 그것은 약효가 있었다. 미국의 제재 직후 남북연락사무소에서 전격 철수했던 북한은 인력 절반을 복귀시켰다. ‘미국의 꼭두각시’라고 맹비난하던 대남 공세 수위도 낮췄다. 기류를 보겠다는 심산이겠지만 물밑 외교의 공간을 열어둔 것이다.
이런 와중에 트럼프는 ‘러시아 스캔들’ 특검 수사의 굴레에서 벗어나 오바마 케어 폐지, 국경 장벽 강행 등 묵은 과제들을 밀어붙이며 거침없는 대선 행보에 들어갔다. 대외정책도 예외일 리 없다. 특히 북핵 문제는 먹잇감을 놓치지 않는 동물적 본능을 가진 트럼프가 결코 간과할 대상이 아니다.
트럼프는 이미 김정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달 초 북한의 미사일 발사장 재건 움직임에 “약간 실망했다”면서도 “두고 보자. 1년쯤 뒤에 알게 될 거다”라고 했다. 앞으로 1년 자신의 대선 일정표에 북한도 비핵화 시간표를 맞추라는 주문이다. 하노이 담판에서 김정은에게 “더 통 크게 가자(go bigger). 다걸기(all-in) 하라”고 재촉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김정은은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트럼프에게 다 걸어도 될까. 그가 재선에 성공하리란 보장도 없다. 더욱이 눈에 보이는 현물이 아니고선 성에 차지 않을 트럼프인데…. 하지만 트럼프가 아니고선 누가 애송이 불량국가 수괴와 얼굴을 맞댔겠는가. 김정은 하기에 따라선 당장 워싱턴 방문 티켓도 내밀 것이다. 시간은 많지 않다. 1년 안에 만족할 성과를 보지 못하면 트럼프는 난폭한 파괴자 본색을 드러낼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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