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현의 바다와 배, 그리고 별]〈13〉태양을 잡다 안경잡이가 되다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3월 29일 03시 00분


김인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선장
김인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선장
원양상선이 부산항을 출항해 미국 서부에 닿기까지는 약 보름이 필요하다. 항해 중 선교 당직은 1등, 2등, 3등 항해사와 당직타수 3명이 세 팀을 이뤄 한 번에 4시간씩 2교대로 이루어진다. 선박이 정한 항로를 따라 잘 항해하는지 확인하고, 접근하는 다른 선박과의 충돌을 피하는 것이 당직의 목적이다. 당직마다 하루의 시간이 다르고 특별한 업무가 주어졌는데, 내게는 색다른 추억을 줬다.

오후 8시부터 자정까지의 근무시간에 3등 항해사는 선내 시간을 변경하는 일을 한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갈 때에는 시간을 하루에 30분씩 당겨야 한다. 오후 8시를 8시 30분으로 하는 것이다. 나는 당직시간이 4시간에서 3시간 30분으로 줄어드는 점을 좋아라했다. 하루가 24시간이 아니라 23시간 30분이 된다. 물론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올 때는 반대다. 마스터 시계를 돌리면, 선내 시계는 모두 이에 맞추어 변경된다.

초저녁잠이 많아 이 근무시간대가 힘들었는데, 당직타수들의 입담은 큰 도움이 됐다. 연배가 많은 이들은 인천상륙작전, 베트남전 참전 무용담을 들려줬다. 이야기 밑천이 떨어져 같은 말을 반복해도 처음 듣는 듯 모른 척 넘어가 주기도 했다.

오전 4시부터 오전 8시까지의 1등 항해사 당직시간은 드라마틱하게 흘러간다. 온 천지가 밝아지는 여명의 아름다움을 즐길 틈도 없이 선교에는 긴장감이 감돈다. 선교 밖으로 통하는 문이 열리고, 초시계와 섹스턴트(육분의)가 준비된다. 1등 항해사는 하늘의 별자리를 확인해야 한다. 배의 위치를 구하는 중차대한 임무다. 대양 항해 중의 레이더는 반사파를 날려줄 물표가 없어 무용지물이다. 별자리를 이용해 위치를 구한다. 수평선과 별이 보이는 소위 박명의 시간은 오전 6시 언저리에 10분 정도밖에 없다. 육분의와 초시계를 들고 부지런히 선교 안팎을 넘나들며 5개 별자리의 고도를 구하고 계산을 마친다. 현재의 위치가 나오면, 나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1990년대 초만 해도 별로 위치를 구하는 방법이 대양에서는 최선이었다. 항해술의 결정판이라고 불릴 만큼 고도의 숙련을 요했다. 정확한 선박 위치를 구하면 선장과 선원으로부터 인정과 존경을 받았다. 별자리를 통해 구한 위치와 실제 위치 사이의 거리 차(2마일 이내가 유효)를 알고 있어야 하는데, 나는 0.5마일로 우수한 편이었다.

오전 8시부터 낮 12시까지는 3등 항해사의 당직시간이다. 아직 경험이 일천하기에 선장이 선교에 올라와 직접 교육시킨다. 30분마다 태양을 잡아 위치를 구하는 훈련을 받았다. 선장이 0900, 0915, 0930, 0945, 1000 등 15분마다 태양을 잡아 정시에 위치를 구하라고 불호령을 내렸다. 너무 밝은 태양을 많이 봐 하선할 무렵 시력이 나빠졌고, 나는 안경잡이가 됐다. 몸을 사리지 않고 열심히 일한 훈장인 셈이다.

10년 내에 무인선박이 도래한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선교에서 행했던 항해술의 발휘, 항해사와 타수들 사이의 애환과 훈훈한 인정의 주고받음이 없어질 것이다. 젊은 시절 바다에서의 추억이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김인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선장
#원양상선#항해#선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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