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오후 발생한 강원 고성 산불은 화재 대응 최고 수준인 3단계가 발령될 정도로 규모가 컸지만 비교적 이른 시간에 큰불이 진화됐다. 이는 소방차들이 신속하게 현장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이 큰 몫을 했다. 고성 산불에는 역대 최대 규모인 소방차 870여 대가 투입됐는데, 강원도소방본부 측은 “법이 바뀌어 주차 차량 파손 등에 대한 신경을 덜 써도 돼 현장 진입을 더 신속히 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2017년 12월, 29명이 숨지고 36명이 부상을 입은 충북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는 불법 주차 차량 때문에 좁은 도로가 막혀 소방차 진입이 늦어져 피해가 커졌다. 당시 법적으로는 소방 활동에 방해가 되는 차량을 강제로 이동시킬 수 있었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거의 적용되지 않았다. 강제처분 권한만 있을 뿐 손실보상 규정이 없어, 지방자치단체가 가입한 민간보험으로 배상해주거나 심하면 소방관 사비로 물어줘야 했다. 과감히 차량을 치우는 대신 소방호스를 길게 연장해 불을 끈 것은 이런 불합리가 낳은, 위축된 소방관들의 고육책이었다.
▷서울시 소방재난본부가 최근 소방차가 불법 주차 차량을 거침없이 밀어붙이고 출동하는 훈련 모습을 공개했다. ‘불도저 소방차’가 되겠다는 선언이다. 제천 참사를 계기로 지난해 개정된 소방기본법에 따라 이제는 출동하는 소방차에 길을 양보하지 않거나 끼어들기 등으로 막으면 100만 원의 과태료를 물어야 한다. 불법 주정차를 했다가 소방차 출동 방해로 파손됐을 경우 일체의 보상을 받을 수 없다. 단, 불법 주정차가 아닌 경우에는 해당 지자체에 보상을 청구할 수 있다.
▷몇 년 전 인터넷에 무참하게 깨진 운전석과 조수석 창문을 통해 소방호스가 지나가는 BMW 차량 사진이 올라 화제가 됐다. 출동한 미국 보스턴 소방대가 소화전 앞에 불법 주차된 차를 보고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창문을 부숴 호스를 연결한 것이다. 차주에게는 배상은커녕 주차위반 딱지와 함께 소방활동로를 막은 책임으로 100달러의 벌금이 부과됐다. 불법 주차 차량은 물론 필요하면 경찰차까지도 밀어버리고 현장 공간을 확보한다. 화재 진압이나 출동에 방해가 되는 차량 등 장애물을 제거하기 위해 배토판(불도저 앞 철판)이 달린 소방도로 확보용 차도 있다고 한다. 탱크를 개조해 만든 러시아의 소방차 ‘빅 윈드(big wind)’는 아예 바퀴가 캐터필러라 짓밟고 지나갈 수 있다. 1초라도 빨리 도착해야 더 큰 인명과 재산 피해를 막을 수 있다는 원칙 때문이다. 우리도 진즉 그랬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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