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살던 사회 초년 시절, 어쩌다 마음이 축난 날에는 퇴근 후 요리를 했다. 평소 즐기는 것도 딱히 잘하는 것도 아니지만 기다리는 사람도 없겠다 한 시간이든 두 시간이든 또각또각 칼질을 하고 무엇이든 만들어 상을 차려 놓고 나면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다. 오후 11시가 다 되어 먹는 집밥이 오후 9시에 사 먹는 국밥보다 몸에 좋을 리 만무한데 괜히 더 건강해지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후에 알았는데 의사들이 우울증을 극복하는 방법 중 하나로 추천하는 것이 바로 요리라고 한다. 작더라도 무언가를 만들어 성취하는 과정과 스스로를 대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빠진 지금은 그마저도 쉽지 않다. 물리적인 시간도 없거니와 그럴 만한 에너지도 남아있지 않아서다. 뭣보다 어쩌다 한 번 요리를 하면 2인 가족이 감당하기에는 식재료 값이 만만치 않다. 실제 쓰는 것보다 유통기한이 지나 버리는 것이 더 많을 때가 있다. 때맞춰 음식물쓰레기를 가져다 버리는 일도 번거롭다. 흰 쌀밥에 찌개, 밑반찬 서너 가지가 올라간 밥상을 차리기 위해 드는 시간적, 금전적 비용에 비해 퇴근길 집 앞에서 사 먹는 국밥 한 그릇은 너무나 간편하다. 그래도 뭔가 집에서 먹는 밥이 그리운 날엔 가정대체식(HMR·Home Meal Replacement)으로 대리만족을 한다. 즉석밥을 데우고 반조리 찌개를 끓여 사거나 얻어온 반찬 몇 가지만 꺼내 차리면 여느 집밥 부럽지 않은 한 상 차림이 완성된다.
요즘 밥을 먹을 땐 TV예능 ‘스페인 하숙’을 즐겨 본다. 비록 나는 지금 반조리 식품으로 가득한 밥상을 꾸역꾸역 씹고 있지만 영상 속에서나마 갓 지은 밥과 보글보글 끓는 찌개를 보며 자위한다. 3분 만에 만든 내 밥상 위의 동그랑땡이 현실이라면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다져 만든 예능 속 동그랑땡은 허구에 가깝다. 어느덧 집밥이라는 것은 산티아고 순례길 못지않은 판타지가 됐다. 그래서일까. ‘쿡방(요리방송)’이 대세인데 요리 인구는 늘지 않고 아이러니하게도 가정대체식 시장 규모만 역대 최고다.
물론 편리하고 어떻게 보면 직접 만든 것보다 맛도 더 낫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워지지 않는 이 허기는, 단순히 주린 배를 채우는 것과는 별개의 일일 것이다. 임순례 감독의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보면 왜 고향으로 돌아왔느냐는 친구의 물음에 주인공 혜원(김태리)은 이렇게 답한다. “나 배고파서 내려왔어.” 아르바이트를 하며 임용고시를 준비하던 서울에서 편의점의 인스턴트 도시락은 그의 주린 배는 채울지언정 허기를 채우진 못 했다.
바쁜 일상에 치여 간편식으로 끼니를 때우고 공기청정기에 의지해 잠을 청한다. 좁은 공간에서 돈을 내고 땀을 흘리고, 생각은 정리할 새도 없이 내일의 쳇바퀴로 갈아탄다. 행복의 근원은 단순하지만 그 실천은 어려워서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는 일종의 판타지와 다름없어 보인다. 다음 휴가는 (어느 예능에서처럼) 어디 공기 좋은 데 가서 하루 세 끼 밥이나 지어 먹으며 보내고 싶다. 어쩌면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떠나는 일보다 더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잘 먹고 잘 자는 일, 참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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