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말부터 동아일보에 연재했던 ‘과학에세이’를 최근 마무리했다. 부족한 글에 지면을 허락해준 편집국에 감사하다. 돌이켜보면 국내보다는 해외에, 동아시아권보다는 영미권에 치중해 연구들을 돌아본 것 같아 아쉽다. 행운인 건 생물학, 수학, 천문학, 물리학, 로봇공학, 의학, 뇌과학 등 두루두루 최신 소식들을 접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지금 한국 과학기술계는 과도한 실적주의와 부처 간 이기주의, 유연하지 못한 교육과 창의성 부재, 나쁜 연구문화라는 4중고에 시달리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과학기술 사업 제안서에 ‘4차 산업혁명’이라는 단어가 들어가야 사업을 따낼 수 있다”는 말이 나돌았다. 기존 제조업을 포함해 인공지능, 사물인터넷, 빅데이터, 소프트웨어, 로봇을 넘어 블록체인과 암호화폐까지 4차 산업혁명의 범주에 포함됐다. 대학가는 물론이고 기업체와 연구소들은 이 그늘에 자리하기 위해 기존 연구계획서를 고치고 있다. ‘창조경제’가 유령처럼 떠돌던 때와 같다.
어떤 중소기업은 인터넷도 되지 않는데, 공무원들이 스마트팩토리를 강조해 적용하려 한다며 한탄했다. 과학기술인들은 각종 행정업무와 회계 맞추기에 급급해 연구개발이 뒷전으로 밀린다. 과학기술인지, 과학행정인지 분간하기도 힘든 실정이다. 과학기술 교육 현장은 더욱 참담하다. 교육통계를 보면 학교 밖 청소년의 수가 수만 명에 달한다. 이들을 ‘학교 밖 청소년’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이미 학교는 시공간과 교수자, 학습자의 경계가 사라져가고 있는데 말이다. 경직된 교육체계에서 말랑말랑한 창의성을 기대하긴 어렵다.
국내 과학기술인들 중 노벨상이나 필즈상, 아벨상 수상자가 없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일지 모른다. 우리가 기억하는 위대한 한국의 과학기술자들은 정말 각고의 개인적 노력을 통해 빛을 발한 경우가 많다. 훌륭한 연구시스템과 문화, 동료애나 협업체계가 부족한 것이다. 특히 학연, 지연, 혈연이라는 신분의 제약은 여전히 유령처럼 과학기술계를 떠돌고 있다. 노비 출신이지만 자격루를 만들어냈던 장영실은 어떻게 죽었는지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같은 시대 서양 과학기술인들은 귀족의 후원에 힘입어 과학기술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이후에도 협업체계는 현대과학의 지평을 새롭게 열었다. 라듐과 폴로늄을 발견한 퀴리 부부는 공동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크릭과 왓슨은 서로의 장단점을 보완하며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밝혀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애플을 창업한 스티브 잡스에겐 스티브 워즈니악이라는 훌륭한 프로그램 개발자가 있었다. 세상 모든 정보의 중심이 된 구글은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이 협업해 탄생했다.
한국 과학기술계가 주목해야 하는 건 과학의 본질이다. 과학은 정치나 행정 혹은 부처나 기관의 이기주의가 아니라 호기심에 찬 창의성과 건강한 비판이 본질이다. 창의성과 비판은 협업체계의 근간이 된다. 정부에서 지시하는 방향으로 연구하고 상사가 명령한 대로 따르고, 교수들이 요구한 대로 실험하면 한국 과학기술은 어두운 그늘만 늘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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