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호기심이 만들어낸 엿보기의 ‘선과 악’ 두 얼굴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4월 12일 15시 36분


맘먹고 패션매장을 방문해 진열된 옷 사이를 한참이고 뒤적입니다. 몇 벌을 골라 이것저것 입어보다 거울 앞에서 한참을 고민하죠. 그러고는 “나 어때?”라고 물어봅니다. 그나마 친한 친구가 옆에서 보고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거울이 발명된 후에도 패션에서 ‘엿보기’는 항상 존재했습니다. 패션은 굳이 묻지 않아도 입는 이의 사고방식이나 성격, 취향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길가다 마주친 낯선 이에게 불쑥 “무슨 음식을 좋아하세요?”라고 묻는다면 요즘 같은 세상에는 경찰서에 있는 내 모습을 낯선 이가 엿보기 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어머, 너무 예쁘세요. 이 옷 어디서 사셨어요?” 라고 묻는다면 기분 안 좋을 사람은 별로 없을 듯 합니다. 길거리에 넘쳐나는 사람들의 패션은 전문가의 엿보기를 통해 분석돼 ‘스트리트 패션’이라는 전문용어로 탄생했습니다. 사람들의 기호와 성향을 파악하고 그들이 다음에 무엇을 원하는지 예측하게 되죠. 그래서 패션은 늘 엿보기를 통해서 전파되고 유행됩니다.

과거 왕족이나 귀족들의 파티에서 선보인 패션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으며 눈을 통한 엿보기로 평민계층이 추종했다면 현대에 와서는 카메라라는 새로운 눈을 통해 패션의 엿보기가 시작됐습니다. 패션매거진의 등장으로 굳이 내가 직접 엿보기를 하는 수고를 하지 않더라도 전문가의 시선과 손길로 다듬어진 너무나 멋진 장면들을 즐길 수 있게 됐죠. 게다가 판매장소와 가격 그리고 스타일링의 제안까지 혼자서 하는 엿보기로는 알 수 없는 정보들까지 덤으로 얻게 됐습니다.

영화는 더 멋진 엿보기를 제공했습니다. 카메라의 눈과 관객의 눈은 하나가 되어 스크린 위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패션을 실제로 엿보기 하듯 바라봅니다.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영화 ‘이창’은 주인공인 사진작가 제프의 시선을 통해 건너편 아파트의 다양한 이웃들의 생활을 엿보는데서 출발합니다. 자유분방한 무용가, 보청기를 끼는 예술가 할머니, 새를 키우는 이웃, 세일즈맨과 매일 잔소리하는 아내 그리고 신혼부부…. 사고로 휠체어 신세를 지는 제프는 이웃의 삶을 엿보기 함으로서 무료함을 달래지요. 의외로 이웃들은 창문을 활짝 열고 그들의 사생활을 공개합니다. 요즘으로 치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올리고 오히려 봐주기를 바라듯 말이죠. 배우들은 타인의 시선을 모른 채 스토리를 이어 나갑니다. 배우들의 대사, 움직임 그리고 그들이 입은 패션이 하나가 되어 내 옆에 있는 듯 합니다. 아무런 방해 없이 1, 2시간 동안 건전한 엿보기를 통해 그 시대의 라이프스타일을 반영한 패션은 미적욕구를 충족시켜 주죠. 게다가 영화에서는 엿보기를 통해 범인인 살인범까지 잡게 됩니다.

직접적으로 패션을 통한 엿보기는 패션쇼 런웨이에서 이루어집니다. 모델들이 눈 앞에서 아무런 대사 없이 음악에 맞춰 런웨이를 활보합니다. 실제로 만질 수 있고 입을 수 있는 의상들로 한편의 퍼포먼스를 펼치는 것 같습니다. 패션쇼의 테마가 정해지면 패션쇼 연출가는 시나리오를 쓰듯 패션쇼의 구성을 짜기 시작합니다. 배우를 캐스팅하듯 모델을 선정하고 헤어와 메이크업을 통해 배우의 캐릭터를 완성하고 조명과 음악, 무대미술을 통해 극적인 요소를 첨가합니다. 마지막으로 패션쇼를 주최하는 디자이너는 감독으로서 이 모든 것들을 조합해 의상에 생명을 불어 넣습니다. 이 직접적인 엿보기를 통해 에디터는 소비자들에게 유행을 전파하고 바이어는 소비자들에게 의상을 공급해 패션산업에 활기를 불어 넣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엿보기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습니다. ‘단톡방 동영상’이다 ‘카톡방 몰카’다 하며 뉴스에서 하루라도 빠질 날이 없습니다. 이 엿보기를 만든 사람도 문제고 유포한 사람도 문제겠지요. 하지만 건전한 엿보기도 은근히 많답니다. 범인을 검거하기 위한 잠복근무도 엿보기이고 아이의 첫 등굣길을 몰래 지켜보는 어머니의 시선도 엿보기입니다. 물론 패션을 통한 엿보기도 그중의 하나이구요. 모쪼록 인간의 호기심이 만들어낸 이 엿보기가 건전하게 쓰였으면 합니다.

간호섭 패션디자이너·홍익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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