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말 각각 주오스트리아 대사, 주이탈리아 대사로 부임한 신재현 대통령외교정책비서관과 권희석 안보전략비서관은 떠나기 전 청와대 동료들에게 ‘농반진반’으로 이런 축하를 숱하게 받았다. 표면적으로는 고된 청와대 근무를 마치게 됐다는 것이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한 참모는 “국가안보실 김현종 2차장 체제에서 벗어나게 되지 않았느냐”고 했다.
그만큼 김 차장은 2월 28일 부임한 직후부터 안보실 직원들을 강하게 밀어붙이고 있다. 부처에서 만든 보고서를 그대로 올렸다가 “제대로 읽어 본 거 맞느냐”는 질책을 받은 직원이 한둘이 아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 등 미국 핵심 인사 발언은 한글 번역본이 아닌 영어 원문으로 직접 확인하라”는 지침도 내렸다. 청와대에서 북핵 업무를 실무 총괄하고 있는 김 차장은 11일 한미 정상회담이 열리기 전 사전 협상을 위해 백악관에 다녀왔고, 언론 브리핑에도 자주 등장하고 있다. 전임자인 남관표 주일 대사보다 활동 폭이 훨씬 넓어졌다.
통상교섭본부장을 두 번이나 맡았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타결을 이끈 김 차장의 전공은 통상.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은 김 차장에게 청와대의 외교, 통일 정책은 물론이고 북핵 이슈까지 맡겼다. 왜 그랬을까.
가장 큰 이유는 남북 경제협력에 대한 그의 소신이다. 김 차장은 노무현 정부 당시 각국과의 FTA 협상에서 “개성공단에서 만든 상품은 한국 원산지로 인정해 달라”고 요구했다. 여기에 남북 FTA 아이디어도 냈다. 노 전 대통령조차 “그게 가능하냐”고 되물을 정도로 파격적인 아이디어였다.
김 차장은 2010년에 쓴 저서 ‘김현종, 한미 FTA를 말하다’에서 “지금까지 남북 경협이 ‘퍼주기’라는 비판을 받았는데, (남북 FTA를 체결하면) 기존 관행을 공식화하면서 국제사회에서 혜택을 받을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남북 경협을 어떻게든 성사시키려고 하는 문 대통령의 뜻에 200% 부합하는 것이다.
대부분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한미 FTA를 관철시켰던 그의 추진력도 문 대통령이 김 차장을 안보실로 불러들인 또 다른 이유다. 김 차장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은 ‘전례가 없다’는 말”이라고 했다. 비핵화 협상에서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겠다”고 공언하고 있는 문 대통령의 의중과 같다.
하지만 통상 협상과 비핵화 협상은 성격이 판이하다. 김 차장은 FTA 협상의 성공 이유로 “동시다발적 추진 전략”을 꼽는다. 한국 시장을 놓고 유럽연합(EU), 캐나다와 경쟁하는 미국에 “EU나 캐나다와 먼저 FTA를 하겠다”고 응수해 협상 테이블에 앉히는 식이다. 그러나 플레이어가 북-미밖에 없는 비핵화 협상에서 이 전략을 똑같이 쓰기란 쉽지 않다.
‘전사(戰士) 김현종’의 특기 중 하나는 벼랑끝 전술. 협상이 빡빡해지면 주저 없이 “없던 일로 하자”며 윽박지른다. 그는 2007년 마지막 한미 FTA 서울 협상 당시 마감시한 하루를 앞두고 카란 바티아 미 협상단장에게 “짐 싸서 워싱턴으로 돌아가라. 그만두자”고 통보해 반전을 이끌어 냈다. 한일 FTA 협상에서는 아예 판을 깼다. 하지만 이런 전술은 북한이 각종 비핵화 협상에서 이미 숱하게 사용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김 차장과 가까운 한 여권 인사는 “노련한 협상가인 김 차장이 비핵화 협상은 FTA 협상처럼 ‘제로섬 게임’이 아니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며 “백악관 관료들의 협상 스타일을 꿰뚫고 있는 사람은 현재로서는 김 차장밖에 없다”고 전했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도 “김 차장이 직원들을 강하게 다그치는 것도 새로운 해법을 찾아야 한다는 고심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미 FTA에 이어 또다시 국가의 명운이 걸린 협상에 참전한 김 차장은 앞서 언급한 책의 말미에 이렇게 적었다. “외교를 잘못해서 나라를 뺏긴 뼈아픈 경험이 있는 대한민국은 세부 사항까지 꼼꼼히 챙기면서도 깊고 넓게 또 멀리 보고 통합할 줄 아는 관료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김 차장 스스로 그 관료가 될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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