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세계경제를 움직이는 최고 권력인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의장과 국제통화기금(IMF) 총재, 독일 총리 자리를 여성이 차지하자 우머노믹스(여성이 주도하는 경제) 시대가 열렸다고 떠들썩했다. 그 무렵 뉴욕 월가의 상징인 황소상 앞에는 ‘두려움 없는 소녀상(Fearless Girl)’이 등장했다. 127cm의 키에 허리춤에 두 손을 얹고 고개를 치켜든 소녀의 당당한 모습은 백인 남성이 지배하는 월가의 성불평등을 고발하기 위함이었다. 2017년 3월 세워진 소녀상은 한 달만 전시되고 사라질 운명이었지만 폭발적 인기를 얻으면서 지금도 월가를 지키고 있다.
▷작은 소녀상이 이끌어낸 성과일까. 지난해 5월 뉴욕증권거래소가 226년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 최고경영자(CEO)를 배출한 것을 시작으로 남성 중심적이던 월가에 변화가 일고 있다. 최근 미 최대 은행 JP모건은 역대 최대 규모로 여성 고위급 간부를 승진시켰다. 소비자대출 담당 CEO와 최고재무책임자(CFO)도 여성이 맡았다. 이 두 여성 리더 중 1명이 2005년부터 JP모건 수장을 맡아 ‘월가 황제’로 군림하는 제이미 다이먼 회장의 뒤를 이을 것으로 전망된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미 은행권 최초의 여성 수장이 된다.
▷한국 금융계도 우먼파워가 세지고 있다. 작년 말 박정림 KB증권 사장이 증권업계 최초의 여성 CEO가 된 데 이어 은행권에서도 여성 임원이 잇따라 배출됐다. 여성 특유의 꼼꼼함과 신중함이 빛을 발하는 리스크관리와 자산관리 분야에서 여성 리더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외환위기 전만 해도 금융회사 여직원은 결혼하면 퇴사하는 게 당연시됐지만 2000년대 들어 팀장 부장을 다는 여성이 많아졌고 2013년엔 권선주 전 기업은행장이 첫 여성 은행장에 올랐다. 모두 높고 단단한 유리천장을 깬 이들이다.
▷한국은 미국보다 앞서 여성 은행장, 여성 대통령까지 낸 나라지만 사회 전반적으로 여풍을 말하기엔 여전히 민망하다. 영국 이코노미스트가 매년 조사하는 ‘유리천장지수’에서 한국은 올해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9개 회원국 중 꼴찌였다. 남녀 임금격차가 크고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이 52.9%에 그친 데다 여성 관리자(12.5%), 여성 임원 비율(2.3%)이 낮은 탓이다. 육아휴직을 하고 자녀를 돌보는 ‘라테파파’가 넘쳐나는 스웨덴이 1위고 미국은 20위다. 세계 금융위기를 촉발한 ‘리먼 브러더스’가 ‘리먼 시스터스’였다면 조화와 균형이 좀 더 강조돼 큰 위기로 번지지 않았을 거란 우스갯소리가 있다. 여성 리더들이 바꿔갈 금융의 미래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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