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국의 우당탕탕]<19>황학동 일장춘몽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4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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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국 방송작가 겸 콘텐츠 기획자
이재국 방송작가 겸 콘텐츠 기획자
지난 주말 황학동 풍물시장에서 이것저것 구경하고 골목길을 빠져나오는데 이상한 기운이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막걸리를 마시고 있는 할아버지 옆에 덩그러니 세워져 있는 그림 한 폭. 수묵화 같은데 낙관도 찍혀 있고 낡은 액자를 보니 예사 그림이 아닌 것 같았다. 그림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자 할아버지는 신경이 쓰였는지 말을 건넸다. “내일 비 오면 안 나올 거야.”

“누구 그림이에요?” “알면 여기다 내놓았겠어? 가져갈 거면 맘 변하기 전에 가져가. 오늘 한잔하고 내일 쉴 거니까!”

아내는 가자고 재촉했고 나는 그림 앞에서 20분을 망설였다. 그림이 말을 거는 것 같아 나는 결심했다. “할아버지 이 그림 주세요! 살게요!” 가로 2m, 세로 50cm에 담긴 산수화를 어렵게 차에 싣고, 집에 왔다. 그리고 그림에 찍힌 낙관과 한자를 사진으로 찍어 형에게 문자를 보냈다. 형은 한자를 많이 아는 사람이다. 잠시 후 답변이 왔다. “‘원포귀범(遠浦歸帆)’이라는 한자고 멀리 포구로 돌아가는 배라는 뜻이야. 옆에 낙관은 승경…사? 승경이라는 사람이 그렸다는 거 같은데. 근데 왜?” “귀한 그림인 거 같은데 자세히 알아봐 줘!”

형에게 다시 부탁을 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승경’을 검색해봤다. 조선 후기의 문인이자 관찰사로 제주도에서 근무할 시절에는 하멜 표류기의 주인공 하멜 일행을 잡아서 조정으로 압송한 이였다. 1594년부터 1665년까지 산 인물이라니. 그럼 300년이 넘은 그림이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리고 승경을 검색한 내용을 캡처해서 형에게 보냈더니 3분 후 답장이 왔다. “승경 이원진이라는 분이 맞는 거 같아. ‘탐라지’라는 작품도 썼고. 근데 이 그림은 왜 물어봐?” “황학동에서 건졌어!” “그래? 나보다 더 잘 아는 형님이 있으니 물어볼게. 한자도 많이 알고 직업이 감정사니까 더 잘 알거야.” 나는 빨리 알아봐 달라고 부탁을 하고 헝겊에 물을 묻혀 정성껏 액자 테두리를 닦아 나갔다. 그리고 1시간 후 답장이 왔다.

“원포귀범은 이인로의 시 제목이고, 시경 사(時耕 寫)는 시경 박익준의 그림.” 형에게 온 메시지였다. ‘아, 시경을 승경으로 잘못 읽었구나.’ 속으로 생각했다. “시경 박익준은 누군데?” “남농 허건 선생 제자래.” 궁금해서 남농 허건 선생을 검색했더니 소치 허련 선생의 손자라고 나왔다. 소치 허련은 누구지? 찾아보니 추사 김정희 선생의 제자였다.

“그래서 가치가 얼마나 되는 거래?” “기다려 봐. 이 형님이 전화를 안 받네.” 나는 너무 궁금해서 유튜브에서 남농 허건 선생의 다큐멘터리를 찾아봤다. ‘진품명품 프로그램에 출연해볼까?’ 별생각을 다 했다. 다큐를 보고 나니 새벽 3시. 그날 밤 꿈에 나는 제주도 어느 포구를 거닐고 있었다. 그리고 늦은 아침, 형에게 전화가 왔다. “뭐래? 어느 정도래?” “시세가 없대.” “어? 그게 무슨 말이야?” “1960년대에 그린 그림 같은데…. 남농 허건 선생 제자가 여러 명이고, 현재는 시세를 논할 정도의 그림이 아니래. 근데 넌 얼마 주고 샀어?” “4만 원….”

형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아니 액자나 그림이나 엄청난 세월이 묻어있는데 시세가 없다니. 어제 남농 허건 선생 다큐를 너무 많이 봤더니 꿈에 나왔다. 이참에 여행 삼아 목포에 있는 남농기념관에 다녀와야겠다.

이재국 방송작가 겸 콘텐츠 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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