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교육정책이 길을 잃고 산으로 간다. 대통령 공약인 ‘자율형사립고의 일반고 전환’ 얘기다. 최근 전북 전주 상산고를 다녀왔다. 구호에 가까운 성긴 정책이 정치적인 동기로 추동됐을 때 어떤 참사가 일어나는지 그곳에서 봤다.
올해 전체 자사고의 절반이 넘는 24곳의 존폐가 결정된다. 자사고 ‘운명의 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가운데 단 한 곳, 상산고를 평가하는 전북도교육청이 기준 점수를 교육부 표준안보다 10점 높이고 교육감 재량인 지표를 늘려 논란이다. 전북도교육감은 재지정 평가를 주택임대차 계약에 비유하며 아예 폐지를 공언하고 있다. 집주인인 교육감이 5년 기한이 끝나 재계약 의사가 없으니 세입자가 학교를 비워야 한다는 논리다. 교육 수요자는 안중에도 없어 보인다.
어떻게 이런 교육감의 폭주가 가능한가. 교육부와 시도교육청이 ‘자사고 폐지’라는 거북한 짐을 핑퐁하다 벌어진 일이다. 당초 시도교육청은 초중등교육법 개정을 통해 교육부가 전국 자사고를 한꺼번에 문 닫게 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런데 적법한 절차로 세워진 자사고를 일방적으로 폐지하려니 법안 통과를 장담할 수 없고, 행정소송 등 뒷감당이 어려웠다. 공은 다시 교육청에 넘어왔다. 2017년 7월 국정기획자문위원회가 대통령 공약을 다듬어 ‘자사고 단계적 폐지’를 내놓은 배경이다. 각 교육청이 재지정 평가를 엄격히 하고, 일반고와 동시 선발로 학생선발권을 제한하겠다는 내용이다.
당시 국정기획자문위에서 교육정책을 손질한 사람이 바로 유은혜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다. 이제는 그 정책을 실현해야 하는 자리에 있다. 교육감이 자사고 지정을 취소하려면 교육부 장관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동의하지 않으면 없던 일이 된다. 결국 자사고 폐지를 둘러싼 갈등의 마침표는 유 부총리가 찍어야 한다.
평가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자사고가 우후죽순 늘며 생겨난 입시 과열 같은 부작용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정권이 바뀌든 말든 일관된 원칙에 따라 평가하고 부실한 곳은 걸러내면 된다. 문제는 옥석을 가리는 대신 아예 수월성·다양성 교육을 봉쇄하겠다는 발상이다. 상산고 학생과 학부모들은 “자사고가 없어지면 우리 교육이 좋아지냐”고 물었다. 이런 성찰 없이 ‘특권학교’ ‘귀족학교’라며 자사고를 공교육 붕괴의 원흉으로 몰아봐야 우리 교육의 근본적인 해법만 찾기 어려워질 뿐이다.
2017년 8월 대입 관련 토론회에 국회 교육문화체육위원회 여당 간사였던 유 부총리가 참석했다. 그는 “일반고에서 준비하기 어렵다. 학생부종합전형을 확대하지 말라”는 학부모들에게 둘러싸여 한참 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어머니, 두 아이 다 일반고 나왔어요. 잘 알아요.” 이 한마디에 학부모들이 “부탁한다”며 물러서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일반고를 보낸 학부모로서 그는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공교육의 질이 전국 고교의 1.7%를 차지하는 자사고가 아닌 나머지 학교의 경쟁력에 달렸다는 사실을. 자사고가 없어져도 공교육이 바뀌지 않는다면 그때는 무엇을 탓할 텐가. 유 부총리가 자사고의 운명을 결정하기 전에 한 번만 숙고했으면 좋겠다. 정말 자사고 때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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