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찾아간 제주 서귀포시 한라산 중턱의 복합의료관광단지 ‘헬스케어타운’ 내 3층 높이 녹지국제병원 건물의 첫인상은 웅장하고 럭셔리하다는 것이었다. 연면적 1만8200m²로 일반 병의원이면 200병상은 되지만 녹지병원은 병상이 모두 1인실이다.
하지만 중국 뤼디(綠地)그룹이 778억 원을 투자해 지은 국내 프리미엄 ‘1호 개방형 투자병원(영리병원)’인 녹지병원은 출항도 못하고 좌초됐다. 녹지병원은 지난달 26일 병원에 남아있던 직원 50여 명에게 해고를 통보했다. 지난달 17일 제주도가 병원 개원 허가를 취소해 사실상 예고된 수순이다.
헬스케어타운 짓다만 건물 수두룩
한때 한중 경제 협력의 상징이었던 녹지병원 사업 좌초는 양국 갈등의 뇌관이 될 수도 있다. 고용을 창출하고 의료관광산업을 키우는 새로운 성장 동력을 모색할 기회도 사라졌다. 뤼디그룹의 대규모 투자는 신화역사공원 제주드림타워 등 제주 곳곳에 중국 자본의 투자를 이끄는 청신호였으나, 이제는 불투명한 행정과 여론에 의한 정책 뒤집기 등의 비판이 나오면서 제주에 투자할 때 조심하라는 경고등이 됐다.
상하이시 산하 부동산개발 전문 뤼디그룹이 제주도와 투자 양해각서를 체결한 것은 2011년 12월. 국토교통부 산하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JDC)가 개발하는 헬스케어타운 153만 m² 부지(약 1조5000억 원 규모)의 절반가량에 1조 원 이상을 투자하기로 했다. 지금은 중국 내 70개 도시에서 랜드마크 건물을 짓고,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세계 8개국에 진출한 뤼디그룹의 첫 해외 투자였다.
콘도 400채를 짓는 1단계는 완료돼 대부분 중국인들에게 분양됐다. 지난달 찾아간 콘도 입구에는 ‘한라산 두자춘(漢羅山 度假村·휴양촌)’이라는 중국어 이름이 붙어 있었다. 콘도 내부 안내문에 중국어와 한국어가 병기되고 프런트 직원도 중국인이었다. ‘제주 속의 중국 마을’이다.
그런데 255채가량의 추가 콘도 일부와 호텔, 쇼핑몰, 테마파크 등을 짓는 2단계는 공사를 진행하다 중단됐다. 헬스케어타운 내 이곳저곳에 짓다만 콘크리트 건물이 즐비했다. 당초 2018년 말까지 끝내기로 했던 뤼디그룹의 개발은 공정 54%만 진행되다 멈췄다. 시진핑 정부가 들어서 외화 반출을 제한하고 한중 간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갈등도 터졌지만 녹지병원을 둘러싼 갈등도 한 요인이다. 문대림 JDC 이사장은 “녹지병원 (허가 지연 및 취소) 문제로 다른 투자를 하기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뤼디그룹의 당초 타운 개발 계획에 안티에이징센터는 있어도 병원은 없었다. JDC가 자체적으로 타운 내에 ‘메디컬 스트리트’를 6곳 조성해 병의원을 모으고, 의료 관광객을 겨냥한 병원은 또 다른 중국 기업 J사와 추진했다. 그런데 양해각서까지 맺었던 J사가 병원 설립을 포기하고 메디컬 스트리트 조성도 지지부진하자 JDC는 뤼디그룹에 병원도 지으라고 했다. 아시아 외환위기 후 외자 유치 등을 위해 김대중 정부 때 입법한 경제자유구역법과 노무현 정부 때 만든 제주특별자치도법에 ‘외국의료기관’ 설립을 허용하는 조항이 마련되어 있었다.
뤼디그룹은 병원 운영 경험이 없다며 병원 설립을 거부했으나 JDC는 2단계 개발 시설 부지 매각을 지연하며 압박했다. JDC와 뤼디그룹이 실랑이를 벌이며 1년 반가량을 보내는 사이 시진핑 정부의 외화 반출 제한이 나왔다. 뤼디그룹의 투자 타이밍이 꼬였다.
2015년 12월 뤼디그룹이 보건복지부로부터 첫 ‘영리병원’ 허가를 받는 과정에서는 원희룡 제주도지사와 JDC 이사장이 발 벗고 나섰다. 외국인 의료 투자 유치와 의료산업 활성화 등을 위한 ‘개방형 투자병원’이 김대중 정부에서 시작돼 박근혜 정부에서 결실을 맺는 듯했다.
元지사 “정부, 영리병원 태도 바뀌어”
녹지병원은 의사 9명, 간호사 28명을 포함해 134명(제주도민 107명)의 직원을 채용하고 2017년 8월 개원 허가를 신청했다. 진료과는 성형외과 피부과 가정의학과 내과 등 4개. 그런데 통상 병의원 개원 허가는 신청 2주가량이면 나오는데 허가는 감감무소식이었다.
그해 5월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뒤 ‘영리병원’에 대한 정부의 기류가 변해 제주도지사가 허가권은 있지만 선뜻 내주지 못했다. 일부 의료단체와 시민단체들은 국내 공공의료 체계가 붕괴될 수 있다며 허가를 내주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원 지사는 문재인 정부 들어 원자력발전소 건설 관련 여론 수렴에서 도입된 ‘숙의형 공론화’를 녹지병원에 적용했다.
지난해 10월 ‘제주 숙의형 공론조사위’에서 반대 권고가 58.9%나 나왔고 원 지사는 ‘내국인 진료 제한’이라는 조건을 달아 지난해 12월 5일 개원 허가를 내줬다. 녹지병원이 복지부가 설립을 허가했고 의료진 등 요건을 갖춰 개원 허가를 신청했다는 점은 JDC 측도 인정했다. 허가를 내주는 데 특별한 하자가 없지만 여론의 반대압력이 높아지자 원 지사가 내놓은 절충 내지 고육책이 ‘조건부 허가’였다. 그런데 ‘외국의료 기관’은 투자자가 외국 자본 100%여야 한다는 조건은 있지만 ‘내국인 진료 제한’ 조항은 관련법 어디에도 없다. 원 지사가 조건부 허가를 내주면서 “행정신뢰도 및 국가신인도, 거액의 손해배상 등을 우려해 허가를 내준다”고 부연 설명한 것도 그런 점을 의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원 지사는 이어 뤼디그룹이 ‘내국인 진료 제한’에 대해 취소 행정소송을 내며 문을 열지 않자 지난달 17일 ‘정당한 사유 없이 개원 허가 후 3개월 내 개원하지 않았다’며 허가를 취소했다. 개원 허가 취소 발표 전날 도지사실에서 만난 원 지사는 “정부가 바뀌면서 영리병원에 대한 태도가 바뀐 것을 느꼈다”며 “허가 취소에 대해 소송이 들어오면 대응할 것”이라고 말했다. 원 지사가 소신을 지켰다면 일이 이렇게 무산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대외 신뢰도 하락 등 후유증 남겨
한 중국 전문가는 “중국에 투자한 한국 기업에 대해 제주도가 녹지병원 허가를 취소하듯 중국 당국이 여론 변화 등을 이유로 조치를 바꾸면 어떻게 할 거냐”고 우려를 나타냈다. 중국 선양에는 롯데가 백화점 호텔 테마파크 등 3조 원 규모의 복합쇼핑몰 사업을 추진 중인데 호텔과 테마파크는 건축허가가 나지 않고 있다. 처음 투자할 때는 협조를 아끼지 않더니 일조권, 소방규정 등을 내세운다고 한다. 롯데가 사드 부지를 제공한 뒤 나온 보복의 뒤끝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이나 중국이나 투자 유치할 때와 그 후의 태도가 다르기는 장군 멍군이다.
복지부는 녹지병원 사태 후 영리병원을 더 이상 허가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영리병원’이 돈벌이를 위해 고가 진료를 부추기고 공공의료 체계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주장이 반영된 것으로 보이지만 반론도 많다.
제주의 원로 의료 전문가인 이유근 아라요양병원장(영상의학 박사)은 “녹지병원 규모의 영리병원이 개원해도 제주에 별다른 영향이 없었을 것”이라며 “제주 의료계도 별다른 반대가 없었다”고 말했다. 이 원장은 “건강보험도 안 돼 내국인 환자 수요가 많지 않을 것이고, 한중 간 성형 수술 격차가 줄고, 중국인 관광객도 줄어 내국인 진료를 허용해도 녹지병원은 오래 버티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개방형 투자병원 설립이 금지된 국가는 한국 일본 네덜란드 등 3개국이지만 일본은 의료특구에는 허용한다.
뤼디그룹 내부 소식에 정통한 한 소식통은 “지난해 12월 원 지사가 조건 없이 개원 허가를 내줬으면 뤼디그룹이 가장 괴로웠을 것”이라며 “개원 허가를 15개월가량 지체하고 법적 근거가 약한 조건부 허가를 붙여 오히려 ‘울고 싶은데 뺨 때린 식’이어서 병원 문은 안 열고 투자비 등 손해 배상 소송을 할 수 있게 했다”고 말했다.
녹지병원 허가 취소 사태는 거액의 손해배상 소송에 휘말리게 하고 대외신뢰도를 떨어뜨렸을 뿐만 아니라 국내 의료산업 발전도 역행하게 하는 등 후유증을 남기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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