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철희]문재인의 ‘멋진 新한반도’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5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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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 내부 향한 對北 신념… 실천과정 없는 공허한 꿈 돼서야

이철희 논설위원
이철희 논설위원
북한의 기습 도발로 빛이 바랬지만 문재인 대통령의 독일 언론 기고문은 무척이나 공들여 쓴 글이다. ‘평범함의 위대함’이란 제목으로 평범한 사람들이 이뤄낸 위대한 성취의 궤적을 광주에서 촛불로, 3·1운동에서 남북평화로 우리 근현대사를 넘나들며 버무려냈다. 누락이나 생략, 그로 인한 거친 비약도 매끈한 문장과 감성적 접근, 적절한 경구로 잘 감췄다.

기고문을 관통하는 주제는 난세(亂世)에 태어난 영웅과 고통 받는 범인(凡人)들의 이분법으로 읽힌다. 화려한 영웅담에 감춰진 평범한 사람들의 비극, 달리 얘기하면 ‘지도자 대 대중’ ‘권력자 대 민중’ 프레임이다. 그래서 한반도 분단의 역사도 ‘평범한 이들의 눈물과 피’에 주목한다. “분단은 개인의 삶과 생각을 반목으로 길들였다. 분단은 기득권을 지키는 방법으로, 정치적 반대자를 매장하는 방법으로, 특권과 반칙을 허용하는 방법으로 이용됐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9월 평양공동선언 발표 직후에도 이렇게 말했다. “그동안 전쟁의 위협과 이념의 대결이 만들어온 특권과 부패, 반인권에서 벗어나 우리 사회를 온전히 국민의 나라로 복원할 수 있게 됐다.” 그러면서 “이 말씀을 드릴 수 있어 참으로 가슴 벅차다”고까지 했다. 평양에서, 김정은 옆에서 ‘우리 사회’를 겨냥한 발언도 이런 역사관에서 나온 것이다.

문 대통령에게 남북 관계는 곧 국내 문제다. 올해 우리 사회의 ‘반(反)평화세력’을 겨냥해 두 차례 발언한 것도 그 연장선에 있다. “아직도 적대와 분쟁의 시대가 계속되길 바라는 듯한 세력도 적지 않다.” “여전히 남북, 북-미 관계 개선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발목을 잡으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면서도 문 대통령은 남북 관계의 초당적 협력, 국론의 통합을 주문한다. 기고문에서도 “이제 남북의 문제는 이념과 정치로 악용돼서는 안 된다”고 했다. 사회 원로들을 청와대로 초청한 자리에서도 “보수 진보, 이런 낡은 프레임, 낡은 이분법은 통하지 않는 세상이 됐다”고 했다. 그 자리가 마련된 것도 기고문을 탈고한 직후였을 테니, 원로들의 ‘협치’ 주문에 “타협은 어렵다”고 밝힌 것은 당연한 반응이었으리라.

분단과 냉전이 낳은 우리 사회의 비정상에 대한 인식은 문 대통령이 평생 살아오며 굳혀온 인식일 것이다. 쉽게 바뀔 리 없다. 그런 인식은 어쩌면 지극히 상식적이다. 하지만 많은 것을 빠뜨린 채 단순화한 자기 신념이 옳을 수만은 없다. 한쪽에선 뚝심이라며 칭송하고 다른 쪽에선 쌍심지를 켤 발언을 공공연히 하는 것도 현명하지 못하다.

특히나 남북 관계는 남과 북이 우선이지, 남과 남이 먼저일 수 없다. 그런데 북쪽에 짚을 건 짚고 있는지부터 의문이다. 변덕스러운 정세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대북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하겠다는 소신도 좋지만 북한이 무슨 망발을 해도 따끔하게 지적하지 못한다면, 그러면서 남남 관계를 우선 걱정한다면 우리 내부 갈등만 심화시킬 뿐이다.

더욱이 대통령의 인식이 완고함을 넘어 집착이 되면 문제는 심각하다. 당장 주변부터 주눅 들게 만든다. 새삼 소신이랄 것도 없는 원칙적 발언마저 혹시라도 북한을 자극할까 봐 서둘러 주워 담는 게 요즘 이 정부의 장관들이다. 공무원이든 군인이든, 나아가 여당 정치인까지 할 소리도 못하게 만드는 분위기라면 더 할 말이 없다.

문 대통령이 그리는 ‘신(新)한반도 체제’, 평범한 사람들이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기 위해 만들어갈 새 질서는 놀랍고 멋지다. 하지만 거기에 이르는 실천의 과정이 보이지 않고 꿈과 의지만 넘치면 공허하다. 새삼 전직 대통령이 남긴 말이 떠오른다. 서생(書生)적 문제의식도 중요하지만 문제를 풀어가는 것은 상인(商人)적 현실감각이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문재인 대통령#남북 관계#북한 기습 도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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