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이 지나가면서 만드는 파도의 길이는 300m 정도. 파도가 높은 정점에 이르렀다가 다시 정점이 찾아오는데 그 두 지점의 길이가 파도의 길이, 즉 파장이다. 이 같은 파장 속에서 내가 승선한 길이 150m의 선박도 마치 종이배와 같은 운명이었다. 파도가 저점을 향해 움직이면 우리 배도 낭떠러지로 사정없이 떨어지듯 곤두박질쳤다. ‘얼마나 더 떨어질까. 더 이상 배가 위로 올라올 힘이 없나 보다. 두렵다. 차가운 바다로 빠지는 걸까. 죽었구나.’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 배는 위로 솟아오르는 파도의 힘에 편승해 서서히 올라왔다. 조금씩 올라오는 뱃머리를 보며 ‘살았구나’ 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것도 잠시, 다시 뱃머리는 바다의 심연을 향했다. 죽었구나 싶지만, 다시 뱃머리는 하늘을 향했다. 이러한 동작들의 반복을 전문용어로 ‘피칭(pitching)’이라 한다. 뱃사람들은 선박이 용왕님에게 절을 한다고 표현한다.
이에 반해 선박의 횡 방향, 즉 옆에서 파도를 맞이할 때 나타나는 선박의 좌우 움직임을 ‘롤링(rolling)’이라고 한다. 오른쪽, 3시 방향에서 파도를 맞게 되면 선박이 왼쪽으로 넘어지는 힘이 작용해 선박은 좌로 움직인다. 선박은 복원력이라는 것이 있어서 넘어지지 않고 제자리로 돌아오는 힘이 작용하니 다시 오른쪽으로 돌아오게 된다. 파도가 낮을 때에는 5도 정도의 좌우 흔들림이 있게 된다. 이 정도는 선박생활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잠도 잘 잘 수 있다. 10도에서 20도 정도의 롤링은 소화제다. 물론 일반인은 뱃멀미를 한다.
태풍이 접근해 파도가 높아지고 횡파를 맞게 되면 선박의 롤링 각도는 점차 커지게 된다. 15도, 20도, 30도에까지 이른다. 침실에 있는 각종 책이나 물건들이 한쪽으로 쏟아진다. 내가 경험한 최고 롤링 각도는 40도다. 침실에 누워 있던 몸이 침대 밖으로 나가떨어질 정도다. 이런 대각도 롤링은 위험하기에 선장은 선박의 선수를 돌려 횡파를 맞지 않게끔 노력한다. 그럼에도 예측불허의 대형 횡파를 맞아 큰 롤링을 경험하게 된다. 50도 정도까지 기울어지면 선박의 뱃전으로 파도가 들어와 침몰 위험에 빠진다.
이렇듯 롤링과 피칭은 선원들에게는 생명을 위협하는 공포의 단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롤링이 있다는 것은 선박이 복원력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복원력이 없다면 선박은 한쪽으로 밀린 경우 다시 중앙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한다. 선박의 무게중심보다 아래쪽에 무게를 둠으로써 복원력을 확보할 수 있다. 피칭이 있다는 것은 선박이 파도를 잘 타고 있다는 의미다. 선박의 길이가 300m이고 파도가 길이가 300m라 치자. 선박의 선수와 선미에 파도의 파정이 걸리게 되면 선박의 중앙은 중력이 작용해서 아래로 내려누르는 힘이 작용하고, 선박의 선수와 선미는 선박을 올리려는 힘이 작용하니, 선박의 중앙 허리가 잘라지는 힘이 작용할 수 있다. 선박 건조술의 발달로 중앙 허리의 철판을 보강해 이런 위험이 없도록 하고 있다. 나는 롤링과 피칭이라는 바다의 현상에 순응하면서 점차 강한 뱃사람이 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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