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스웨덴 기업인 A사는 한국지사 폐쇄를 결정했다. A사는 초고압변압기 절연유, 타이어 원료유 등을 생산하는 기업이다. 이런 제품들은 화학적 성상(性狀)이 맞는 원유가 따로 있어서 창업 이래 90년 동안 베네수엘라 원유를 써 왔다.
이 회사가 어려워진 건 베네수엘라 원유에서 문제가 생긴 5년 전부터다. 원유에 바닷물이 섞였다거나, 정제 과정에서 결함을 일으켰는데 해가 지날수록 개선되기는커녕 악화될 뿐이었다. 20년 동안 베네수엘라국영석유기업(PDVSA)이 ‘포퓰리즘 정권’의 돼지저금통 노릇을 하며 망가진 결과였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익히 아는 줄거리다.
베네수엘라의 국내 사정으로 어려움을 겪던 A사가 결정적인 타격을 입게 된 건 미국의 독자 제재로 인해서다. 지난해 부정선거 의혹 속에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이 재선한 이후 미국이 그의 ‘돈줄’인 베네수엘라국영석유기업을 독자 제재 리스트에 올린 것이다. A사가 직접 제재 대상이 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베네수엘라국영석유기업이 지분을 갖고 있는 데다 원유 거래를 한다는 이유로 금융회사들이 기피하기 시작했다. 나중에라도 세컨더리보이콧(제3자 제재)을 당하지 않을까 우려해서다. ‘스치기만 해도 문 닫아야 한다’는 미국 독자 제재의 실상이다.
씨티은행, 도이체방크 등은 달러로 지불된 A사 상품대금을 꽁꽁 묶어버렸다. 자금이 돌지 않으니 회사가 버틸 재간이 없었다. A사는 베네수엘라국영석유기업이 일찍 지분을 정리하길 바랐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조용히 임기만 채우고 나가면 되는데 누가 책임 있는 결정을 하겠느냐는 것이다.
결국 올해 초 A사 본사 대표가 바뀌었다. 수익성이 떨어지고 규모가 작은 지사 3곳과 공장 1곳부터 정리했다. 그중 한 곳이 한국이다. 2010년부터 A사에서 근무한 관계자는 “미국 독자 제재 대상에 오를 가능성만으로도 신용이 하락하고 국제금융거래망에서 퇴출될 위기에 처했다”며 “이란이나 북한과 거래를 하려는 한국 기업이 있다면 신중해야 한다”고 했다.
한국에서 일어난, 그런데 나라 이름이 여럿 등장하는 이 이야기의 플롯은 복잡하지만 어쩐지 낯설지 않다. 비중 있는 조연으로 등장하는 베네수엘라국영석유기업. 2003년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은 이 기업의 직원 절반을 해고했다. 2년 전 마두로 대통령 시절에는 직원 70여 명이 부패 혐의로 체포됐다. 이곳에서 생산하는 원유 품질이 좋다면 이상한 일이다. 베네수엘라는 아주 극단적인 사례지만 정권에 따라 부침을 겪는 공기업은 우리도 늘 목격했던 바다.
세컨더리보이콧의 직격탄을 맞은 A사를 보며, 북한산 석탄 반입 의혹의 여진으로 기업과 은행들이 떨고 있는 사정이 떠오른다. 최근에는 개성공단 자산 점검을 위한 기업인 방북도 승인됐는데 해당 기업에 약이 될지, 독이 될지 모를 일이다.
A사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나라가 얼마나 국제사회와 긴밀하게 연결돼 있는지를 새삼 깨닫는다.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이라면 국제 정세를 외면한 ‘평화’ 또는 국제 흐름과 동떨어진 ‘경제’가 오히려 우리를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