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책 듣기에 푹 빠졌다. 전자책이 처음 나왔을 때 나는 시큰둥했다. 책을 좋아하고, 책을 쓰는 작가로서 책은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읽어야 제맛인데 전자책은 왠지 책 같지 않았다. 이후에도 전자책과 친해지려 몇 번 시도를 했지만 역시 나에게 책은 읽던 페이지를 다시 펼치고, 기분 좋은 날이면 친구에게 한 권 선물해줄 수도 있고, 다 읽고 나면 서재에 꽂아두고 괜히 기분이 흐뭇해지는 것. 그것이 책이었다.
우리 집에는 열두 살 딸이 함께 살고 있다. 작가의 딸은 책을 좋아할 것 같지만 학교에서 숙제로 읽는 책 말고는 당최 책을 안 읽는다. “사람은 책을 읽어야 해. 그래서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이런 말이 있는 거야.” 귀에 딱지가 앉도록 얘기했지만 책보다는 유튜브를 더 좋아하고, 세상 정보는 모두 유튜브에서 얻는 것 같았다. 그런데 오디오북을 들려줬더니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책을 읽는 것보다 듣는 게 편하고 재미있다는 반응이었다. 생각해보니 아이가 한글을 모르던 시절, 나는 책을 많이 읽어줬다. 읽은 책을 몇 번씩 읽어주고, 온갖 성대모사에 동물 울음소리까지 섞어가며 읽어줬고, 아이는 매일 저녁이면 책을 읽어달라고 졸랐다. 그때 내가 읽어준 게 일종의 오디오북이었구나. 아이는 그렇게 재밌는 상상의 세계로 책을 접했는데 막상 한글을 배우고, 활자로 된 책을 접해 보니 예전에 아빠에게 듣던 오디오북보다 재미없다고 느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오디오북을 접하고 보니 어쩌면 옛날에 할머니 할아버지가 해주시던 옛날이야기나 아빠가 읽어주던 그림책의 연장선인 것 같아서 더 재밌어 하는 것 같았다.
아이가 유치원 다니던 시절 “우리 집 가훈이 뭐야”라고 물어 당황했던 적이 있다. “정직한 사람이 되자.” 이 말은 너무 딱딱한 것 같아서 고민하고 있는데 “나 우리 집 가훈 알아. 할아버지가 알려줬어!”라고 했다. 나는 “아빠가 갑자기 생각이 안 나네. 가훈이 뭐지?” 물었더니 “항상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행복하게 살자”라고 대답했다. 한글을 몰랐던 아이는 할아버지께서 해주신 그 말을 열심히 외웠고, 지금도 누가 가훈을 물어보면 또박또박 대답한다. 어쩌면 할아버지의 오디오가 그만큼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
책은 무조건 종이에 활자가 적힌 걸 뜻하고, 독서는 그 활자를 읽는 것이라는 단순한 접근은 버려야 할 것 같다. 우리나라에 목판 인쇄술이 나오기 전까지는 구전(口傳)으로 내려온 이야기들이 많았다. 그런 오디오 콘텐츠들이 세기를 넘어서 이어질 수 있었던 건, 다양한 이야기의 힘이자 오디오 콘텐츠가 주는 상상의 세계가 독자를 매료시켰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나관중의 삼국지를 책으로 읽고 감동을 받았고, 또 어떤 사람은 오디오 콘텐츠로 삼국지를 듣고 감동을 받은 사람도 있다. 플랫폼이 다양해지고 미디어는 점점 쉽고 재밌는 방법으로 독자를 끌어들인다. 어떤 게 가장 좋은 방법이고, 가장 사랑받을 콘텐츠가 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자리에 멈춰 독자를 기다리느냐 아니면 독자에게 한 발짝 다가서서 그들이 원하는 걸 주느냐. 그게 관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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